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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경제] ‘할리우드 이혼’ 기업도 배워야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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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호 20면

결혼할 땐 어색하더라도 이혼 생각을 해두는 것이 마음 편한 시대다. 특히 기업 간 결혼에서는 ‘예비 이혼서류’가 더 절실해 보인다. 허니문의 단꿈에만 젖을 것이 아니라 결렬에 대비한 조항을 꼭 넣어야 한다는 얘기다.

최근 재계에서는 여천NCC 사태가 이슈가 됐다(본지 11월 18일자 18면). 일반인에게 생소한 이름이지만 여천NCC는 한화·대림이라는 국내 굴지의 재벌회사가 출자해 만든 회사다. 자산이 3조원, 매출 4조4000억원(2007년 예상)으로 그 자체로 공룡 기업이다.

여천NCC는 외환위기의 부산물이다. 1999년 석유화학 부문에 대한 과잉투자로 위기에 직면하자 대림의 이준용 명예회장과 한화의 김승연 회장은 양사의 NCC(나프타분해센터)를 통합한다는 데 합의한다. 그해 12월 말 두 회사가 50%씩 자본금을 대 여천NCC가 탄생했다.

그러나 이 회사 임직원에게 지난 8년은 ‘악몽’이었다. “모든 회사의 운영을 50대50으로 대등 운영한다”는 합병 합의서가 걸림돌이었다. 회사는 바람 잘 날이 없었다. 2001년 노조 파업에 대해 유화책을 제시한 이 명예회장이 강경 대응을 주장한 한화 측과 갈등을 겪다 김 회장에게 “제발 한 번 만나달라”는 신문광고 공세를 펼치기도 했다. 지난 9월엔 대림 출신 직원들이 한화 측 이신효 대표 집무실에 몰려와 “대림 출신의 진급 비율을 높여달라”며 시위를 벌였다. 급기야 지난달 12일 이준용 명예회장이 여천NCC의 등기이사로 복귀했다. 하지만 문제가 더 꼬였다. 이 명예회장은 29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김승연 한화 회장과 허원준 한화석유화학 사장 등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고 밝혔다. 이신효 대표가 ‘대림산업이 보유지분을 넘긴다면 한화가 인수할 의향이 있다’는 발언을 했다며 이것을 문제 삼았다.

이 명예회장은 “대등 합작회사의 경영인이 할 수 없는 발언이었다”며 한화 측을 강도 높게 비난했다. 사내 갈등이 법정으로 옮겨가면서 외환위기라는 벼랑 끝에서 탄생한 국내 최대 NCC 회사가 또다시 벼랑 끝에 몰린 것이다.

대림과 한화는 현재 서로 물러서기도, 갈라서기도 어려운 형편이다. 여천NCC의 거래처가 대림코퍼레이션·한화석유화학 등 양 그룹의 주력 계열사로 엮여 있고 공장의 파이
프라인도 하나로 통합돼 있어 무 자르듯 잘라내기가 힘들다. 어느 한 회사에서 지분을 내놓는다고 했을 때 상대방에게 우선 매수권을 준다는 합의조항이 있지만 지금으로선 그럴 의사도 별로 없어 보인다.

여천NCC 사태를 보면 ‘이혼을 대비해야 하는 이유’가 분명해진다. 기업 간 결혼에는 허니문만 있는 것이 아니다. 또 절반씩 균형을 맞춘 합작기업은 삐걱거릴 일도 많다. 내부 합의도, 사업 진행도, 그 결과도 반반씩 책임져야 하니 의사결정이 더딜 수밖에 없다. “세계적으로 대등 합작기업이 10년 이상 지속된 경우가 15% 이하”(김기홍 부산대 교수)라고 하니 결혼 생활이 행복한 게 오히려 이상하다. 지분 50%는 ‘함정’처럼 보인다.

이럴 땐 할리우드 배우의 결혼이 벤치마킹 대상이 될 수 있다. 할리우드 특급배우들은 “이혼할 때 어떻게 재산을 분할하겠다”고 분명히 한 다음에야 결혼식을 치른다. 냉정해 보이지만 ‘심각한’ 상황 변화에 대비한 합리적인 판단이다. 고통스럽더라도 결혼 서류에 ‘이혼조건’(결렬조항)을 명시할 것! 여천NCC 사태가 보여주는 기업 결혼의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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