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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한 이들의 믿음·분노가 살아 숨쉰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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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호 14면

“판사나 변호사가 법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당신들이 법을 만듭니다.”

스크린 속 배심제

시드니 루멧 감독의 영화 ‘평결’(Verdict: 한국 출시제목은 ‘심판’)에서 의료과오 소송의 원고 측 변호사는 배심원들 앞에서 이렇게 최후 변론을 한다. ‘사실판단을 하는 배심원들은 판사보다도 더 큰 힘을 가질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변호사(폴 뉴먼)는 이 영화에서 식물인간이 되어버린, 가난한 원고를 대리해 유명한 병원을 상대로 홀로 소송을 벌인다. 판사는 이미 병원에 매수된 듯 보인다. 변호사는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실제 의사의 실수를 목격한 입실수속 간호사를 찾아내어 마지막 증언대에 세운다.

하지만 판사는 증거법상의 이유들을 들어 “간호사는 증언대에 서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라며 증언 자체를 무시할 것을 명령한다.

판사의 법대로라면 원고는 져야 한다. 재판을 지켜본 병원의 직원도 그렇게 원장에게 보고한다. 그러나 원장은 묻는다. “당신은 간호사 말이 믿기던가요?” 폴 뉴먼은 최후 변론에서 배심원들이 판사의 법(증거법)을 어기더라도 배심원 자신들이 진실이라고 믿는 사실에 따라 평결할 것을 요청했던 것이다.

조디 포스터에게 두 번째 오스카상을 안긴 영화 ‘피고인(Accused)’에서 배심원들은 혁명적인 판례를 남긴다. 선정적인 옷차림의 주인공이 술에 취해 술집에서 낯선 남자에게 키스를 당한다. 주변의 남자들은 좋은 구경거리라도 만난 듯 거부하는 주인공을 남자가 강간해주길 바라며 박수를 쳐댄다.

주인공은 구경꾼들에게 둘러싸여 3명에게 윤간을 당한다. 그러나 법률시스템은 주인공을 ‘강간’ 피해자는커녕 ‘피고인’으로 취급하며 강간범들을 단순폭행으로 처리해 버린다. 이에 주인공은 강간 모습에 박수 치며 구경한 사람들을 ‘강간교사’ 범죄자로 지목해 그녀가 당한 일이 ‘강간’이었음을 다시 확인하려 한다.

시의 검찰국장은 “가만히 서서 박수 친 사람을 강간공범으로 몰 수는 없을 것”이라며 기존 법리 속에 매몰되어 있지만, 배심원들은 목격자의 생생한 증언을 듣고 주인공 편을 들어준다. ‘사실의 위대함’이 ‘판례의 보수성’을 뛰어넘을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존 트래볼타 주연의 영화 ‘민사소송(Civil Action)’은 실화에 바탕을 둔 영화다. 에르메스 넥타이만 매는 멋쟁이 변호사(존 트래볼타·실존 인물은 앤 쉴리크만)는 말한다. “배심 재판에서는 급사한 사람보다 오랫동안 앓다가 죽은 사람이 더 가치가 있다.”

사망한 사람에 대한 위자료가 5000만원이고 그보다 작은 피해는 그 금액에서 빼나가는 한국에 비해, 미국에서는 배심원들이 감정이입을 통해 ‘내가 저런 고통과 피해를 당한다면 얼마를 받아야 위로가 될까’라는 질문에 답하면서 위자료를 정한다. 그러다 보니 사망에 대한 위자료만도 쉽게 10억, 100억원을 넘는다. 그래서 트래볼타의 말처럼 오랫동안 고통받은 만큼 배상액이 커지는 것이다.

주인공은 배심원들로부터 기록적인 액수의 손해배상 판결을 이끌어내 돈과 명예를 모두 얻은 변호사다. 그가 고기라면 배심원이 피해자에게 느끼는 동정심은 물이다. 그러나 고기를 물 밖으로 끌어낸다면?

주인공은 식수원을 오염시켜 아이들을 죽게 만든 대기업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다. 피고 측 변호인과의 친분이 엿보이는 판사는 배심원들이 판단을 공정하게 내려야 한다며 피해자의 눈물겨운 증언을 듣지 않은 상태에서 1차 판단을 내리도록 한다.

사실판단에 대해 배심원이 전권을 가진 데 반해 판사는 절차에 전권을 가지고 있다. 결국 피해아동 유족들은 배심원들에게 호소할 기회도 얻지 못하고 소송에서 패배한다. ‘고기를 물 밖으로 끌어낸’ 피고 측 변호사는 말한다. “진실? 진실은 끝없이 깊은 심연의 밑바닥에 있다네.”

맷 데이먼 주연의 영화 ‘레인메이커(Rainmaker)’는 배심원들의 분노를 보여준다. 원고는 백혈병으로 죽어가는 소년이고 피고는 그가 죽을 때까지도 보험금 지급을 거부한 악덕 보험회사다. 원고 측은 회사가 다른 모든 케이스에서도 보험금 지급을 의도적으로 지연해왔음을 배심원들에게 증명한다.

배심원단은 화가 났고, 배심제도는 이런 분노가 징벌적 손해배상으로 표출되도록 만든다. 배심원단은 영화 속에서 4000만 달러의 징벌적 손해배상을 선고한다. 액수가 너무 커지자 보험회사는 파산신청을 해버린다. 주인공 변호사가 원고 유족에게 “미안하다. 한 푼도 못 받게 됐다”고 하자 소년의 어머니는 답한다. “됐어요. 나 같은 아줌마가 그런 거대 악덕기업을 문닫게 한 것으로.”

이들 영화 4편 중 3편은 민사소송을 다룬 것이지만 배심원의 상식과 마음에 터잡고 있는 배심 재판의 작동 원리를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형사소송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할리우드 영화는 배심제의 순기능과 역기능을 동시에 공부할 수 있는 교재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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