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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흐뭇하게 만드는 사람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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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미국의 국제관계 전문지 『포린 폴리시』 인터넷판이 지난주 추수감사절(22일)을 앞두고 ‘추수감사절에 감사해야 할 다섯 가지 이유’라는 기사를 게재했다. 헤드라인 뉴스들이 바그다드에서 이슬라마바드까지 온통 어둡고 우울하고 그래서 세상은 전혀 나아지지 않은 듯 보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우리 모두 고마워해야 할 것들도 있다는 것이다.

첫째는 비행기 사고 사망률 격감. 지난해 민항기 사고율이 사상 최저를 기록한 데 이어 올해도 낮은 사고율이 유지되고 있다. 지난해의 경우 승객이 무려 21억 명이었는데 사고 사망자는 855명이었다. 둘째, 전 세계 5세 이하 어린이의 사망률도 줄고 있다. 지난해에 970만 명이 숨져 처음으로 1000만 명 밑으로 떨어졌다. 셋째, 전쟁이 줄었다. 1992~2003년 사이에 무장세력 간의 전투가 40%나 줄었고, 특히 1000명 이상의 사망자를 내는 대규모 분쟁 횟수는 80%가량이나 줄었다. 넷째, 하루에 1달러 이하로 생활하는 극빈층 인구가 적어졌다. 81년에는 15억 명이 하루 1달러 이하로 살아갔다. 그러나 90년 12억5000만 명으로 줄었고, 2004년에 다시 9억8500만 명으로 감소했다. 마지막으로, 수명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 50년 전에 태어난 아기의 기대 수명은 약 49세였다. 그러나 벌써 세상을 떴어야 할 그들이 앞으로 18년 더, 즉 평균 67세까지 살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내일이면 2007년의 마지막 달, 12월에 접어든다. 벌써 동창회니 향우회니 각종 송년 모임이 줄을 잇고 있다. 그러나 사회·경제적 이슈로 접어들면 모임마다 대체로 어둡고 우울한 이야기가 주류를 이루는 듯하다. 노무현 대통령을 탓하려면 이미 웬만한 모임에서는 돈을 미리 내야 간신히 이야기 꺼낼 자격(?)을 얻을 지경이 됐다. 그러나 나는 『포린 폴리시』처럼 거시 통계를 들이댈 필요도 없이, 우리 사회가 아직은 살 만하다는 최신 증거를 여러 개 갖고 있다.

 첫째, 11월 10일 리어카를 끌다 교통사고로 별세한 서울 석관1동 엄석남(88) 할아버지의 자녀들이 주민센터(동사무소)를 찾아와 고인이 생전에 모은 돈 254만4000원을 내놓았다. 엄 할아버지는 폐지·고물 수집으로 생계를 이어 온 사람이다. 자녀들은 “아버지가 평소 ‘내가 죽으면 모은 돈은 어렵게 살아가는 노인들을 위해 써달라’고 유언했다”고 말했다.

 둘째, 서울중앙지법 이동근 판사 앞으로 최근 초등학교 4학년 여학생이 쓴 편지가 배달됐다. 인터넷 도박 게임장을 운영한 혐의로 기소된 아버지를 선처해 달라고 호소하는 편지였다. 초등생은 “아빠·엄마가 이혼해 지금은 아빠·오빠와 살며 학교에 다니고 있다”며 “우리 아빠를 한 번만 용서해 주시면 열심히 공부해 의사가 된 뒤 불쌍한 사람을 도우며 살겠다”고 썼다. 비뚤거리는 글씨였지만 그래도 “오빠가 자기는 글씨가 엉망이어서 저보고 대신 판사님께 편지를 예쁘게 써 보라고 했다”고 집필 경위를 밝혔다. 1주일 뒤 이 판사는 초등생 아버지를 집행유예로 풀어 주었다.

셋째, 9년간 30억원을 기부해 온 ‘기부 천사’ 가수 김장훈씨가 선행을 인정받아 얼마 전 아산상 사회봉사상을 받았다. 그는 상금 5000만원을 또 기부금으로 내놓았다. 김장훈씨는 남는 돈으로 기부하지 않는다. 가계부에 기부할 금액을 미리 써 놓고, 그 금액을 제외한 나머지 돈에 맞춰 생활한다.

 온통 대통령 선거 뉴스로 도배가 되고 있지만 나는 새 대통령이 나라를 하루아침에 변화시킬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는다. 게다가 국제뉴스가 ‘바그다드에서 이슬라마바드까지’ 어둡고 우울하다지만 한국 대선은 ‘1번에서 12번까지’ 아무리 훑어봐도 찝찝하기만 하다는 사람이 많다. 대선 후에도 믿고 기댈 사람은 따로 있다. 엄 할아버지, 초등생, 김장훈씨 같은 사람이다. 그들이야말로 우리를 진짜 흐뭇하게 만드는 사람이자 사회의 든든한 버팀목이다. 그러니 마치 대선이 세상의 전부인 양 다시는 안 볼 사람처럼 그악스럽게 서로 할퀴지 말자.

노재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