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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끝나지 않은 ‘방만 경영’ 업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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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

김선홍(75) 전 기아그룹 회장은 현재 서울 강북구 미아동의 105.78㎡(32평형) 아파트에 살고 있다. 한때 재계 8위 그룹의 총수가 산다고 하기엔 극히 평범한 아파트다. 일상도 단출하다. 부인과 함께 강남의 한 대형교회에 거의 매일같이 나가는 것이 눈에 띄는 외부 활동이다. 이 아파트의 경비원은 “요즘은 찾아오는 사람도 드물다”고 했다.

꼭 10년 전인 1997년. 10조원에 달하는 천문학적 부채에 짓눌린 기아그룹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건설ㆍ특수강 등으로 사업을 무리하게 확장했던 게 화근이었다. 계열사들의 적자가 쌓이고 자금 악화설이 돌면서 기아차마저 자금난에 허우적거렸다. 채권단은 7월 부도유예협약 대상으로 지정하고 김 회장의 사퇴를 압박했다.

하지만 그는 “불명예 퇴진을 하느니 죽음을 택하겠다”며 마지막까지 버텼다. 대권 후보들까지 끼어든 공방 끝에 10월 22일 기아차는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3개월여를 우왕좌왕한 대가는 혹독했다. 그사이 대외신인도는 추락할 대로 추락했고, 결국 외환위기의 단초를 제공했다.

김 전 회장은 이듬해 분식회계 혐의로 4년을 선고받았다. 2000년 형 집행정지로 풀려난 뒤 평화자동차의 고문으로 활동하기도 했지만 이도 곧 접었다. 이 업체 관계자는 김 전 회장이 “가끔 들를 뿐”이라고 했다. 2005년에는 잠실의 아파트마저 압류당하자 차남 명의의 현 거주지로 옮겼다. 이후 그는 침묵하고 있다. 연락이 닿은 부인에게 그의 근황을 물었지만 “할 말이 없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김 전 회장뿐 아니라 당시 줄줄이 쓰러진 ‘옛 총수’들에게 외환위기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무리한 차입과 방만한 경영으로 경제에 큰 짐을 지웠던 대가를 모두 치르기에는 10년 세월도 모자랐던 셈이다. 김 전 회장은 상대적으로 평온한 편이다. 잇따른 소송과 스캔들로 여전히 구설에 오르고 있는 이들도 많다.

김석원(63) 쌍용양회 명예회장이 대표적이다. 1997년 쌍용차의 부실로 그룹 전체가 휘청거리자 그는 정치활동을 접고 그룹에 복귀했다. 이후 쌍용차 매각과 쌍용정유·쌍용중공업 등 계열사 처분 등 구조조정에 힘쓰는 듯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310억여원의 회사 돈을 빼돌린 것이 밝혀져 2005년 징역 3년,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지난 2월 특별사면을 받고 재기하는 듯했다.

하지만 불과 9개월 만에 신정아 교수 학력위조 사건 여파로 다시 검찰의 수사를 받고 있다.

97년 당시 줄도산의 ‘신호탄’을 쏜 정태수(84) 한보그룹 전 회장은 벌써 세 번째 구속을 앞두고 있다. 지난달 서울고법은 그가 재판에 계속 불참한다며 직권으로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서울 대치동 은마상가 일부를 자신이 이사장으로 있는 대학의 간호학과 학생들의 임상실습 숙소로 임대하는 허위 계약서를 맺고 보증금 명목으로 60억여원을 가로챈 혐의다. 이에 앞서 정 회장은 91년 12월 수서지구 택지 특혜분양사건으로 구속 기소돼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또 97년 한보그룹이 부도를 낸 뒤 불법대출 사건으로 구속돼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2002년 말 특별사면됐다.

박건배(59) 해태그룹 전 회장은 지난달 말 징역 1년6개월을 선고받았다. 97년 해태그룹 주요 계열사가 부도 처리된 뒤에도 위장 계열사를 경영하면서 회사 돈 35억여원을 빼돌렸다가 적발된 것이다. 박 전 회장은 외환위기 이전 ‘탈(脫)제과’를 외치며 인켈·나우정밀 등을 잇따라 인수하며 과도한 투자에 나섰다가 건실한 제과회사마저 무너뜨렸다.

장진호(55) 전 진로그룹 회장도 역시 영역 확장을 시도하다 탄탄한 본업마저 잃은 경우다. 장 전 회장은 88년부터 사업 다각화를 추진, 건설과 유통사업 등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97년 7월 자금난으로 그룹은 부도를 맞았고 결국 소주시장을 석권한 진로마저 2003년 법정관리로 넘어갔다. 이후 분식회계로 집행유예형을 받은 그는 올 초 사면 대상으로 거론되기도 했지만 결국 최종 명단에서는 제외됐다.

외환위기의 결정판은 재계 2위 대우그룹의 해체와 ‘김우중(71) 신화’의 몰락이었다. 환란(換亂)의 와중에서도 쌍용차를 인수하는 등 외형 위주의 경영을 지속했던 대우는 99년 한계에 몰렸다. 워크아웃 돌입 직전 출국한 김 전 회장은 해외를 떠돌다 2005년에야 귀국해 재판을 받았다. 징역 8년6개월에 17조9000억여원의 추징금이 확정돼 현재 형집행정지로 요양생활을 하고 있다.

전혀 다른 길을 걷는 이도 있다. 최원석(64) 동아그룹 전 회장은 최근 영화감독으로 데뷔했다. 첫 작품은 블랙코미디물이다. 비극과 희극의 경계를 넘나드는 ‘옛 총수’들의 운명을 상징하는 것일까.

조민근 기자 jmi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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