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두 배로 보는 즐거움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6호 31면

청년과 장년을 구분하는 대표적 증상을 아시는지. 사십대 중·후반을 경계로 책이나 신문의 작은 활자가 보이지 않게 된다. 이제 눈 찡그리는 것만으론 모자란다. 나 같은 안경잡이가 무엇을 읽기 위해 안경을 수시로 들었다 놓았다 반복하는 모습은 일상이다. 노화는 공평하게도 모두에게 찾아온다. 세속의 영화와 관계없이 함께 늙는다는 것, 뭐 하나 내세울 것 없는 이들에겐 새삼스러운 위안이다.

윤광준의 생활 명품 이야기-에센바흐 돋보기

문제는 글씨를 읽지 않고 살아갈 방법이 없다는 심각함이다. 세상은 여전히 문자의 시대를 산다. 온 나라를 뒤덮은 인터넷도 읽어내야 내 것이 된다. 답답해서 원시용 안경을 용도에 따라 두 개나 새로 맞췄지만 이것만으론 모자란다. 배율 높은 돋보기도 필요하다. 중요한 내용은 언제나 작은 글씨로 감춰져 있기 때문이다. 서글프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현실이다.

광화문의 복잡한 K매장에 갈 때마다 진열된 돋보기를 만지작거렸지만 선뜻 사지 못했다. 아직, 아직은… 이것을 쓸 때가 아니란 의식의 거부일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단단한 의식도 사소한 불편 앞에서 힘쓰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정 필요해서 사야 한다면 좋은 물건으로 골라야 한다. 깨어있기 위한 선택은 스스로를 접대하기 위한 몸부림이다.

독일의 에센바흐, 세계 최대·최고의 돋보기 메이커다. 무려 200여 종이 넘는 확대용 제품을 만들고 있다. 명색이 사진가인 내가 렌즈의 성능에 무심할 리 없다. 투명 아크릴로 만들어진 볼록렌즈는 독일의 광학 제품다운 선명함과 일그러짐 없는 상을 만든다. 단일 렌즈 한 장으로 빛 번짐을 최소화한 수차(收差) 제거 능력은 신기할 뿐이다.

큼직한 사각 렌즈와 손에 쥐기 편리한 사선의 손잡이는 정확하게 책의 전면을 커버한다. 무수한 테스트를 통해 찾아낸 각도의 적용일 것이다. 손잡이 바로 위엔 5배의 배율을 지닌 작은 렌즈를 붙여놓았다. 더 작은 글씨 혹은 미세한 티끌까지 확대해 보여주는 루페 기능의 친절한 배려다.

에센바흐 돋보기는 짜증나는 잔글씨의 공포를 희석시켰다. 이젠 손바닥만 한 크기에 담긴 카메라 매뉴얼도, 현기증 나는 CD 라이너 노트의 내용도 힘들이지 않고 읽어낸다. 남들이 모르는 내용을 아는 척할 수 있는 바탕이다. 알아야 할 것은 여전히 많고 읽을 수 있는 시간은 점차 줄어만 간다. 하지만 어쩌랴, 판독의 의지만큼이 내 몫임을.

머리 빠진 수도사가 돋보기를 들여다보는 영화 속 독서 장면이 요즘 나의 모습이다. 영화와 다른 점이라면 난 에센바흐를 들고 있을 뿐이다. 책 읽기의 필수품이 된 돋보기…. 필요 없을 때 더 많은 독서를 해 두었어야 했다. 하지만 늦은 자각이 출발의 신호탄이 되기도 한다. 에센바흐는 필요한 부분을 두 배의 크기로 보여준다.

그만큼 ‘읽기’에는 더 많은 시간이 걸린다. 느림의 독서는 에센바흐가 가져다준 선물이다. 꼭 보아야 할 것만 선별하는 습관은 새로운 도구가 가져다준 효능이라 믿고 있다.


윤광준씨는 사진가이자 오디오평론가로 활동하면서 체험과 취향에 관한 지식을 새로운 스타일의 예술 에세이로 바꿔 이름난 명품 마니아입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