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송호근칼럼

노장의 귀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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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노장(老將)이 돌아왔다. 화려하고 처절했던 옛 전투의 기억을 환기시키며 노장수가 돌아왔다. 두 차례의 고지 탈환에서 실패한 장수라면 자결로 생을 마감해야 마땅할 테지만, ‘순신불사(舜臣不死·이순신은 죽지 않았다)’를 되뇌며 고물이 된 열두 척의 배를 손질하는 그의 표정은 비장하다. 배신·반칙·노욕(老慾), 혹은 민주정치의 파괴자라는 여론의 불화살을 감내하며, 소설가 김훈의 표현처럼 ‘바람 불고 물결 높은 마지막 바다’에 나선 그가 ‘한 줄기 일자진(一字陣)으로 맞으려는 아득한 적’은 누구인가. 좌파정권, ‘불안한’ 선두주자, 또는 패장의 상처?

유권자들은 노장의 출현이 돌발 영상인지 ‘몰래카메라’인지 아직 어리둥절하다. 맥 빠진 선거판에 갑자기 긴장이 감돌기 시작했다는 점을 제외하곤 말이다. 먼 하늘에 번쩍거리는 마른 번개가 게릴라성 호우로 변해 겨우 추슬렀던 영토를 엉망으로 만들지 모른다는 위기감에 후보들도 떨고 있다. 선거 드라마 중 가장 극적인 사건으로 기록될 이 ‘대선 습격사건’은 한국의 정치 풍토에서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는 돌발 사태이며, 시대적 필연성을 담아내기에는 뭔가 부족한 듯 보이는 후보들의 난립이 불러들인 화근이다.

분명히 말하건대, 그의 출사는 정도(正道)에 어긋나고 민주정치의 기초를 뒤엎는다. 그럼에도 무작정 비난 성명만을 해댈 만큼 이번 선거판이 정당성과 필연성을 확보했는가에 대해서 회의적인 사람도 많다. 노장이 노린 틈새가 이것이다. 정권의 행적을 따지고 미래진로를 탐색하는 계기가 대선이라면, 우선 공과를 심판받아야 할 정당이 사라졌다는 게 치명적 결함이다. 여당 해체와 변신의 변은 들렸으나 진정성을 담은 자성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여당의 군졸들은 정동영 후보의 달변 뒤에 숨어 내년 총선에서 생환할 궁리를 하고 있으며, 군소정당들의 외침은 난쟁이 나라의 함성 정도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이명박 후보가 박근혜를 끌어안고 권력 분점의 성을 단단히 쌓았더라면, 노장의 언감생심은 접혔을 것이다. 독주와 독점의 대가가 이토록 쓰리다는 것을 이제사 알아차린들, 보수 영토를 반분해 노장에게 무료 양도해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어쩌랴, 선거 지형이 달라졌기에 40일 전투를 지휘할 사령부를 이전하고 전략가들을 새로 기용해야 하는 이 냉혹한 현실을. 전선은 매우 복잡해졌다. 노장의 출현이 인물·경륜·지역성을 축으로 묘한 기류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후보들로서는 노련한 이 패장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까닭 없는 왜소증을 극복하는 것이 급선무이고, 경상도와 충청도를 가로질러 한양 탈환에 나설 퇴역 반군들의 때늦은 기세를 조기에 진압하는 것이 둘째다. 우파 내전을 바라보는 좌파 진영도 초조하기는 마찬가지다. 진보 병기가 녹슨 마당에, 노세대의 심기를 건드리고 자존심을 짓밟은 지난날의 치기가 퇴장하는 전쟁 반공 세대들을 재결집하도록 만들 줄이야 누가 예상이라도 했겠는가 말이다.

그랬다. 지금은 참호 속에 납작 엎드려 기회만 엿보고 있는 386세대 정치인들에게 “성난 얼굴로 돌아보지 말라”고 누군가 타일렀다. 노세대의 피와 땀을 친미와 친일로 낙인찍지 말고, 군부독재에 빌붙은 비겁한 청춘이었다고 욕하지 말라고 했다. 누군가 그랬다. 그런 얼룩진 청춘을 바쳐 국민소득 1만 달러 국가를 만들었으니 3만 달러, 4만 달러 국가로 키워 달라고 사정했다. 그러나 지난 4년이 어떠했는가를 돌아보라. 부친 살인이 도처에서 일어났고, 아버지 세대의 유산은 화장장으로 보내졌다. 그러나 그들이 돌아왔다. 관 속에 누웠던 그들이 구호만 요란했던 혁명 세대의 설익은 횡포에 기어이 종지부를 찍고 싶은 것이다. 노장의 귀환은 386세대에 대한 60, 70대의 선전포고다. 따라서 이 세대전의 ‘아득한 적’은 이명박이 아니라 정동영 뒤에 숨은 386 정치인들과 비정한 진보 세력이며, 전쟁 세대의 존재를 말소하고자 했던 이들의 세계관이다. 그런데 한국현대사의 갈피마다 배어 나오는 시대적 애환에 별 감흥을 느끼지 않는 인터넷 세대가 유권자의 절반 이상을 점하는 오늘날, 애석하게도 이 노장의 비감한 전투가 성공할 확률은 그다지 높지 않다. 40일 뒤, 그가 다시 장렬하게 전사하더라도 노세대의 가슴은 후련할지 모른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