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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튀자” 7년간 2594명 도주… 송환은 40명 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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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호 13면

범죄를 저지르고 해외로 달아난 사람이 매년 늘고 있다. 하지만 송환되는 경우는 드물다. 해외도피 사범은 2001년부터 지난 8월까지 2594명. 범죄인 인도를 청구한 것은 이 중 93명(3.6%)이다. 그러나 실제로 송환된 사람은 40명, 전체 도피사범의 1.5%에 불과하다. ‘한탕 해서 우리나라를 떠나자’는 심리가 확산되는 배경이다. 특히 대형 사건을 저지른 뒤 해외로 달아난 사람들이 사회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은 크고도 깊다.

BBK 김경준씨 송환 계기로 본 해외 도피사범

민주당 권노갑 전 고문의 측근으로, ‘동교동 특무상사’로 불리는 이훈평 전 의원. 그는 서울 여의도의 한 커피숍에서 기자와 만나자마자 대뜸 “우리도 그 사람, 찾고 있다”고 했다. 언제든 행방이 포착되면 바로 ‘체포’에 나설 수 있도록 안테나를 세우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가 애타게 찾고 있는 사람은 권 전 고문과 박지원 전 청와대 비서실장의 재산관리인으로 알려진 무기판매상 김영완(54)씨. 김씨는 현대그룹 고 정몽헌 회장에게서 거액의 비자금을 받아 권 전 고문 등에게 전달한 혐의를 받고 있다. 그러나 대북송금 사건에 대한 특검법이 공포된 직후인 2003년 3월 미국으로 출국한 뒤 행방이 오리무중이다.

김씨는 같은 해 8월 해외에서 변호사를 만나 자술서를 작성해 검찰에 제출했다. 각각 “현대에서 200억원을 받아 권 전 고문에게 전달했다” “박 전 실장이 받은 현대 비자금 150억원을 대신 관리해왔다”는 내용이었다. 재판 과정에서 진술을 믿을 수 없다는 지적이 제기되자 검찰은 주일 영사를 통해 일본에 체류 중이던 김씨를 신문하기도 했다.

김씨 진술로 징역 5년의 확정 판결을 받았던 권 전 고문 측은 문제의 200억원을 김씨가 중간에서 빼돌렸다고 주장하고 있다. ‘배달사고’라는 설명이다. 이 전 의원은 올 들어 김씨가 국내에 몰래 들어왔다는 제보가 접수되자 즉시 추적에 나섰다고 했다.
“공항에 알아봤지요. 그런데, 김영완이란 이름으로는 입국한 사실이 없다는 거예요. 다시 알아봤더니 ‘영 킴’(Young Kim)이란 이름의 캐나다 여권으로 국내에 들어왔다는 얘기가 있습디다. 국내에 빌딩이 몇 개나 있는 사람이에요. 언젠가는 반드시 돌아올 겁니다.”

말레이시아의 골프장에서 김씨를 본 사람도 있다고 한다. 김씨가 무기판매를 하면서 만든 국제 네트워크를 활용해 ‘007 영화’의 주인공처럼 미주와 아시아를 자유롭게 오가고 있다는 얘기다. 미국 LA에서 김씨와 만난 것으로 보도됐던 검사장 출신의 한 변호사에게 김씨의 행방을 물었다.

“잘못된 보도입니다. 잠깐 사건을 도와주긴 했지만, 내가 직접 만난 적은 없어요. 당시 접촉했던 변호사 말로는 가끔 김씨에게서 전화가 걸려오긴 하는데 어디에 있는지는 말하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2004년 김씨가 낸 민사소송을 맡았던 송기방 변호사도 “사건 의뢰를 했던 것은 김씨의 측근들”이라며 “김씨와는 일면식도 없고,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고 말했다. 송 변호사는 “수십억원대의 승소 판결을 받아냈으나 착수금만 받고 사례금은 받지 못한 상태”라며 “의뢰인들이 ‘회장님 지시를 받아야 한다’고 해서 나도 김씨가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법무부 역시 “김씨의 주소지를 알 수 없어 범죄인 인도청구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론스타 펀드의 한국 본부장이었던 스티븐 리(38)는 외환은행 헐값매각 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다. 론스타 펀드가 세금을 포탈하고 860만 달러를 해외로 불법 송금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했다는 것이 검찰의 수사 결과다.

리는 2005년 4월 국세청이 세무조사에 착수하자 출국했다. 법무부는 리의 미국 내 주소인 뉴저지주 쇼트힐스를 거주지로 보고 범죄인 인도 청구를 해놓은 상태다. 그러나 리는 미국 국적이어서 미국 정부가 그의 신병을 확보하더라도 어떤 결정을 내릴지 판단하기 어렵다. 법무부 측은 김경준씨의 경우처럼 많은 시간이 걸릴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국제크리스천연합(JMS) 교주인 정명석(62)씨와 금융사기범 변인호(50)씨는 현재 중국 공안에 구금돼 있다. 정씨는 종교단체 공금 횡령과 여신도 성폭행 의혹이 제기되던 1999년 해외로 출국했다. 2001년 대만에서도 여성들을 성폭행한 혐의로 현지 검찰의 내사를 받자 말레이시아와 홍콩으로 옮겨 다녔다. 2003년 7월 홍콩에서 불법체류 혐의로 붙잡혀 한국으로 압송되기 직전 미화 10만 달러를 내고 보석으로 석방, 중국으로 밀입국했다가 지난 5월 체포됐다. 정씨 사건을 수사해온 서울중앙지검은 “중국 랴오닝성 인민법원이 정씨의 신병을 한국으로 인도한다는 판결을 내렸다”며 “최고인민법원 비준 등의 절차가 남아 있어 이르면 내년 2월께 국내로 송환될 것”이라고 밝혔다.

3900억원대의 사기 행각을 벌인 변씨는 1심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은 뒤 중국으로 달아났다. 구속집행정지로 풀려나 입원 치료를 받아오다 99년 1월 병원을 빠져나간 뒤 위조 여권을 이용해 중국으로 밀항했던 것. 도주 6년 만인 2005년 8월 중국 공안에 체포됐다. 하지만 정씨와 달리 언제 돌아올지 예측할 수 없다. 법무부 국제형사과 이성범 사무관은 “현지에서도 사기범죄를 저지른 사실이 드러나 12년 형이 선고된 상태”라며 “형 집행이 만료돼야 보내줄 수 있다는 게 중국 정부의 입장”이라고 했다.

역시 대형 사기극을 벌이고 해외로 달아난 전종진(43)씨. 그는 98년 아시아자동차(기아자동차의 옛 계열사)를 상대로 4000억원대의 수출 사기를 벌인 혐의로 재판을 받던 중 보석으로 풀려나자 브라질로 도주했다. 전씨는 한국 측의 인도 청구로 지난해 7월 현지 경찰에 체포됐다. 현재 브라질 상파울루에 구금돼 송환 절차를 밟고 있다.

취재 과정에서 그들의 행방을 수소문하면서 “그걸 왜 알아보느냐” “다 끝난 사건 아니냐”는 질문을 받곤 했다. 수사기관에서도 “담당자가 바뀌어서 확인해봐야 한다” “기록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고 연락 주겠다”고 했다. 도피자들이 노린 것은 이렇게 쉽게 잊어버리는 우리 사회의 습관성 건망증인지도 모르겠다.

해외도피 어떻게송환하나

해외도피사범을 송환해오는 절차는 검사가 검찰총장을 거쳐 법무부에 범죄인 인도를 신청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인도 청구서는 외교통상부를 통해 해당 국가에 전달된다.
이어 해당국의 법무부와 검찰이 타당성을 판단해 체포영장을 청구한다. 영장이 법원에서 발부되면 송환 단계로 넘어가나, 이때 미국 등에선 범죄인에게 이의를 신청할(인신보호 요청) 기회를 준다. 법원이 내린 송환 결정에 항소도 할 수 있어 실제 송환까지는 길게는 2~3년 동안 지루한 싸움을 벌여야 한다. 송환이 확정되면 검찰이 2~3명으로 송환팀을 구성해 현지 공항까지 날아가 신병을 넘겨받는다.

법무부는 “해당 국가에 주소를 정확히 알려주지 않으면 인도 청구를 해도 송환 절차가 진행되지 않는다”며 “피해자나 관련자의 제보 없이는 힘들다”고 설명한다.

송환 요청은 범죄인 인도조약이 체결된 국가로 제한된다. 현재 우리나라는 미국·일본·중국·호주·베트남 등 28개국과 인도조약을 체결한 상태. 나머지 나라는 대책이 없다. 국제법상 상호주의 원칙에 따라 협조를 기대할 수 있을 뿐이다.

인터폴(국제형사경찰기구)도 큰 힘이 되지 못한다. 별도의 조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각국 경찰이 전산망을 통해 범죄인 정보를 공유하는 수준에 머물기 때문이다. 가장 높은 단계인 ‘적색 수배’를 내려도 범인이 숨어 있는 나라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면 단순 통보 수준에 머물게 된다.

그러나 도피사범들이 알아둬야 할 것이 있다. 형사소송법 253조 3항은 ‘형사처분을 면할 목적으로 국외에 있는 경우 그 기간 동안 공소시효는 정지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언제든 국내로 들어오면 처벌을 받게 된다는 얘기다. 또 현지에서 송환을 거부하는 법정 투쟁을 벌이다 1~2년 수감생활을 했다고 해도 나중에 한국에서 받을 실형 기간이 줄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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