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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인의 한 수] "고객 마음 재는 '다른 자'있지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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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서울 신문로 삼성생명 빌딩 지하 공간은 이른바 스타일리시한 점포들로 가득하다. 점포들의 이름 또한 ‘국제적’이다. 그런데 이 공간 한쪽에 눈길을 끄는 점포가 한 곳 있다. 1950~60년대 양복점을 의미했던 ‘장미라사’다. 왠지 국제적인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요즘 말로 하자면 ‘촌스러운’ 이름이다.

이런 느낌은 한 시간만 그 앞을 서성거려보면 안다. 지난 10월 15일 오후 2시부터 3시까지 그 앞을 지켜보고 있었더니 역시나 다양한 반응이 일어났다. 특히 몇몇 젊은 커플이 지나치며 자기네들끼리 물었다.

“장미…라사? 뭐 하는 곳이지?”

고개를 갸웃하던 그들은 이내 속삭이듯 웃음소리를 흘리며 지나쳤다. 아마도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윤종용 삼성 부회장도 단골

하지만 세상에는 보여지는 것과 다른 것이 많다. 이곳이 특히 그렇다. 라사(羅紗)라는 옛 이름을 내걸고 있지만 요즘의 일반적인 상식, 다시 말해 ‘옛 이름=시대에 뒤떨어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맞춤 판매되는 양복 한 벌 가격은 200만~1300만원. 가장 비싼 양복은 2400만원까지 간다.

‘흔히’ 판매되는 가격대로 치면 400만~500만원대에 이른다. 괜한 가격이 아니다.

이곳 단골 리스트에는 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 삼성그룹 계열사 CEO들은 물론이고 서울에서 내로라하는 성공한 기업가들과 부자들 500여 명이 올라 있다. 여기서 단골이란 1년에 2~3벌의 옷을 맞추는 고객이다. 대한민국 최고급 양복 1번지라고 할 만하다.

이 단골 리스트에 올라있는 분으로부터 장미라사 이야기를 들었던 순간 한 가지 궁금증이 강하게 일었다. 도대체 어떤 ‘신의 손’이 이런 양복을 만드는 걸까?

지난 10월 15일 한 시간 동안 장미라사 앞을 서성거린 후 약속된 오후 3시에 그를 만났다. 밝은 표정의 50대 신사인 그의 이름은 이상범(54). 이곳에서는 수석 재단사라는 직급을 갖고 있고 단골들에게는 ‘이 실장’으로 불리는 그가 바로 ‘신의 손’이었다.

몇 마디 인사말을 나눈 후 실례를 무릅쓰고 그의 손을 보자고 했다. 손가락이 약간 길뿐 여느 손과 똑같았다. 하지만 그의 손이 움직이면 수백만원짜리에서 수천만원짜리 양복이 탄생한다.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의 남편인 필립 공, 네팔의 왕족들도 그가 만든 옷을 입었다. 가치창조를 외치는 요즘 경영학의 시각으로 보면 그는 분명 달인의 영역에 있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가치를 창조하는 것일까? 옷감이 비싸기는 하지만 최고급 맞춤양복이란 활동성과 편안함, 그리고 멋과 품위가 어우러져야 한다. 옷감을 잘 만진다고 좋은 옷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고객의 신체 치수를 잘 잰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고객의 몸 상태와 성향까지 잴 수 있어야 한다.

“저희 가게의 단골은 대개 아주 바쁜 분들입니다. 당연히 제게 주어진 시간도 짧아요. 양복 주문할 때 10분, 가봉(시침질)할 때 10분, 납품할 때 5분이 전부죠. 이 찰나에 고객의 모든 것을 파악해야 합니다.”
가격을 감안해보면 ‘순식간에’ 이루어지는 셈이다. 그렇다고 무뚝뚝하게 자신의 일만 열심히 하는 것은 고수의 자세가 아니다.

“주문할 때 10분 이상 치수를 재면 모두들 지루해 합니다. 바쁜 시간을 쪼개서 오기도 했지만 속옷만 입고 3면이 거울인 방에 서 있는 것도 어색하거든요. 그래서 그런지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일일이 얘기해주는 분들은 별로 없습니다. 그렇다고 일일이 물어볼 수도 없습니다. 이런저런 주제로 자연스럽게 대화하면서 감을 잡아야 합니다. 이러니 예민해질 수밖에 없죠.”

▶1943년 경남 하동 출생. 스무 살 때인 1973년 옷감을 만지기 시작한 경력 34년의 베테랑이다. 1983년 장미라사에 입사했고, 그동안 CEO들은 물론, 내로라하는 부자들과 청와대를 고객으로 만든 대한민국 양복 재단의 1인자라고 할 수 있다. 신사복의 본고장인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방한했을 때 남편인 필립 공의 양복을 만들었을 정도로 그의 실력은 세계적인 수준이다.

몸 치수는 자로 재지만 고객의 마음속에 있는 옷에 대한 성향을 재려면 ‘다른 자’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옷에 대한 성향이) 눈으로 보여지는 것과 다른 분이 꽤 있습니다. 몸의 이곳 저곳을 하나하나 뜯어볼 수 없으니 한눈에 파악해야 합니다. 특히 (진짜 옷을 잘 만드는가 하는) 의심을 품고 온 분들을 대할 땐 더 예민해지죠.”

이런 까닭에 항상 컨디션을 최고조로 유지해야 한다. 고객의 숨은 마음을 읽지 못하면 그걸로 끝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그는 오래전부터 자신만의 감각 유지법을 실행해오고 있다. 요즘 말로 자기관리다.

그 첫 번째는 감각 살리기다.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오전 5시50분에 일어나 집 주변의 동산까지 걷고 뛰는 운동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그저 그런 몸풀기 운동이 아니다. 예를 들어 같은 시간이라도 주변이 캄캄한 겨울에는 손전등을 들지 않고 오로지 오감으로 산길을 걷는다.

“아무도 없는 어두운 산길을 걸으면 온 몸이 긴장되면서 감각을 곤두세우게 됩니다. 눈이 아닌 오감으로 걷는 것이죠. 눈이 오면 마음으로 걸은 뒤 날이 밝아진 다음 제 걸음걸이를 살펴봅니다. 비뚤어지지 않았는지 저도 모르게 신발을 끌지는 않았는지 확인합니다. 자세가 흐트러진다는 것은 감각이 살아있지 않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경기도 과천에 살다가 9년 전 일산으로 이사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지하철 4호선은 지하구간이 많은 까닭에 사계절에 대한 감각을 잊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가끔은 SUV 차량을 몰고 경기도 가평의 야산을 질주한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차를 세워놓고 친구들과 술 한잔 하면서 쏟아질 듯한 별을 보는 즐거움을 위해서다.

그의 두 번째 비결은 바른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다. “바른 자세로 일하면 집에 가서도 피로가 바로 풀린다”는 게 그의 말이다. 실제로 그는 오전 9시에 출근해 점심식사를 제외하고 오후 7시30분 퇴근할 때까지 하루 종일 서 있다. 인터뷰를 하는 1시간 45분 동안에도 그는 흐트러지지 않은 자세로 편안하고 바르게 앉아 있었다.

“건강의 기본은 어깨와 골반입니다. 골반이 비뚤어지면 척추가 비뚤어지고 결국 목 근처의 쇄골도 기울어져 몸에 무리가 옵니다. 비싼 옷을 입는 것도 좋지만 자세가 좋아야 품위가 생기지요. 건강한 사람을 잘 보시면 자세가 바를 겁니다. 사실 멋이라는 것도 밝은 표정과 좋은 걸음걸이에 적절한 유행을 가미하는 것이지요.”

덕분에 그는 50대로 보이지 않는다. 사실 이런 건강한 몸매는 고객관리에 큰 도움이 된다. 이른바 ‘높은 분’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말을 함부로 할 수 없는데 그들이 “이 실장은 어떻게 그런 좋은 몸을 갖고 있느냐”고 물어오기 때문이다.

그는 얼마 전에도 한 그룹 회장으로부터 같은 말을 들었다. 이런 대화는 관계 증진에 큰 도움이 된다. 그들의 생활 속으로 들어가는 대화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VIP 고객을 관리한다는 것은 결국 마음을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즘엔 외국에서도 주문

“옷이 마음에 드는지, 안 드는지는 고객이 옷을 가지고 돌아갈 때 드러납니다. 옷이 마음에 들면 저나 직원들보다 공손하게 온몸을 굽혀 인사를 하거든요. 돌아가는 발걸음이 그렇게 가벼워 보일 수가 없어요. 그럴 땐 마음이 뿌듯하죠.”

1973년 고향인 경남 하동에서 상경한 그는 아는 사람의 소개로 양복점에 취직했다. 국내 최초의 기성복 업체로 서울 원효로에 있었던 부흥사가 그곳이다. 그 후 10년 뒤인 83년 1월 당시 최고로 꼽히던 장미라사에 스카우트돼 지금까지 한 길을 걷고 있다. 그런 그에게 “본인이 최고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예전에 한창 일을 배우던 무렵 선생님이 일을 잘 안 가르쳐주셨어요. 그래서 선생님이 퇴근하시면 바닥에 있는 헝겊 조각들을 밤새 스카치테이프로 붙여보곤 했죠. 그땐 몰랐고 서운했는데 기술자는 자기 완성이란 게 없는 것 같습니다. 어떤 경지에 오른 분들을 생각해보면 주변에서 인정하는 것이지 자신이 스스로 완성됐다고 하지 않지요. 당연히 이래라 저래라 가르칠 수 없는 겁니다. 그저 자신이 먼저 보여줄 따름입니다. 그것을 따라 하고 안 하고는 배우는 사람들이 선택할 일이죠.”

그는 비결이라는 말에 손을 내저었지만 기자에게는 겸손해야 한다는 말로 들렸다. 그의 세 번째 비결이다. 장미라사의 이영원 사장은 “원래 VIP 고객들은 이런저런 말을 별로 하지 않는 특성이 있는데 이 실장에게는 극찬을 한다”면서 “특히 기술도 좋지만 훌륭한 인격에 대해 칭찬하는 분이 많다”고 했다.

“정말 겸손하고 항상 배우는 자세를 가졌습니다. 특히 양복은 기술뿐만 아니라 문화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하는데 아시아에서 이런 분 찾기는 힘듭니다. 가히 세계적인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엔 외국에서도 주문이 늘어나고 있어요.”

그래서일까? 그에게는 삶을 치열하게 살아본 이들에게서 느껴지는 부드러움이 있었다. 자신을 단련시키는 일에 익숙한 이들에게서만 느껴지는 부드러움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성공이란 게 뭘까요? 저는 옆에서 가깝게 모셔본 고객들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어느 날 그 유명했던 분들이 세상을 떠나고 영어(囹圄)의 몸이 되는 걸 보면서 건강이 성공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건강해야 합니다.”

서광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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