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비즈니스 메카로] 3. 움직여라! 공무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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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평택의 대만계 전자업체 인포디스크 직원들은 1년 넘게 재정경제부와 산업자원부를 오가며 진땀을 흘리고 있다. 신제품인 DVD-R와 DVD-RW.DVD복합기 등 세 품목을 고도기술수반사업으로 인정받아 세금감면 혜택을 보기 위해서다. 2002년 10월 두 부처를 처음 찾았을 때 반응이 좋았다. 담당 공무원들은 "2003년 7월 관련 항목을 조정할 때 처리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결과는 DVD-R가 빠진 채 나머지 두 품목만 처리됐다. 회사 측은 "CD-R(일명 공CD)가 고도기술수반사업으로 이미 지정된 마당에 이보다 용량이 7배나 큰 첨단 DVD-R가 제외된 것은 납득하기 힘들다"는 입장을 전달했다.

*** 똑같은 서류 몇번씩 요구

누락 이유는 엉뚱하게도 담당 공무원의 행정착오였다. 산자부가 기술검토 끝에 세 제품 모두 'OK' 판정을 재경부로 보냈는데, 재경부가 관련 서류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DVD-R 항목을 실수로 빠뜨린 것이다.

재경부 관계자는 "다음 항목 조정 때 반영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말이 다음이지 적어도 1년은 기다려야 한다.

산자부는 DVD-R를 조세감면 대상인 DVD-RW의 범주로 해석하자고 재경부에 제안했다. 하지만 재경부는 두 제품의 성격이 다르다며 반대했다. 결국 두 부처는 '디지털 시그널 리코딩 기술'이란 인접 항목을 찾아내 구제하기로 하고 기술검토를 다시 받도록 했다. 그런데 기술검토를 다시 한 산자부 산하기관은 최근 '기준미달로 탈락'이란 판정을 내렸다. 회사 측은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다"고 허탈해하고 있다.

한국에 진출하는 외국 기업들이 가장 속을 끓이는 문제 중 하나는 바로 공무원들의 태도다. 청와대와 정부는 한국을 동북아 경제중심으로 만들겠다는 구상을 쏟아내지만, 정작 일선 공무원들을 접해본 외국인 투자자들은 "아직 멀어도 한참 멀었다"고 입을 모은다.

무사안일.복지부동은 그래도 낫다. 돕지는 못할망정 발목을 잡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싱가포르계의 한 컴퓨터 부품회사는 2000년 말 중부지방국세청에서 '이전가격 서면 조사'가 필요하다는 통보와 함께 본사와의 거래자료 제출을 요구받았다. 그 내용이 워낙 까다로운 데다 분량도 방대해 서류제출에만 2년이 걸렸다. 그런데 2003년 3월 국세청 본청에서 같은 사안의 서류를 다시 요구받았다. 본청과 지방청 사이에 업무협조가 안 됐기 때문이다.

회사 측은 "1년도 안 돼 같은 자료를 왜 또 내야 하는가. 직원들이 자료수집과 작성 때문에 정상 업무를 못할 지경"이라며 KOTRA 옴부즈맨 사무소를 통해 이의를 제기했다. 그제야 국세청은 "누락.보완서류만 요청하겠다"고 한발 물러섰다. 이 회사는 옴부즈맨 사무소에 "국세청과 관계가 불편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므로 언론 등에 회사 이름이 노출되지 않도록 해달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 규정만 내세우기 일쑤

"다른 나라 공무원들은 기업이 어려운 문제에 직면하면 어떻게든 해결해주기 위해 발벗고 나선다. 그러나 한국 공무원들은 관련 규정만 들먹이기 일쑤다. 신축적인 대안을 제시할 수도 있으련만, 조금이라도 걸리는 규정만 나오면 전혀 움직이지 않는 게 한국 공무원인 것 같다."(태미 오버비 주한미국상공회의소 수석부회장)

지난해 7월 한국에 진출한 미국 파파존스 피자는 최근 식초에 절인 고추(페페론치니)를 고객에게 무료 서비스하기 위해 국내로 들여오려다가 통관을 거부당했다. 식품의약품안전청이 페페론치니 샘플에서 검출된 이산화황 성분(0.07%)이 기준치(0.03%)보다 높게 나왔다며 부적합 판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이 회사의 김진현 한국지사장은 "미국.영국.중남미 등 세계 12개국의 3천여개 매장에 나가는 페페론치니가 왜 한국에서만 문제가 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金지사장은 한국과 다른 나라의 실험방법 등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며 제3국의 검사기관에서 성분분석을 받게 해달라고 정부에 요청했으나 거부당했다.

금융컨설팅 회사인 마켓포스의 제임스 루니 대표는 "제발 호랑이(한국 경제를 상징)를 자유롭게 미래의 산으로 달려가게 하라"고 주문한다. "흔히 한국을 '아시아의 호랑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지금 이 호랑이는 정부가 친 철창에 갇혀 있다. 철창 안에서 공무원들이 갖다주는 먹이만 받아먹다 보면 사냥기술은 물론 뛰는 능력마저 잃게 된다. 하루빨리 우리를 열어 호랑이가 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중국 등 경쟁자들은 이미 드넓은 벌판에서 펄펄 뛰고 있지 않는가."

그렇다면 한국 공무원들의 국제경쟁력은 어느 정도인가.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은 지난해 한국 정부관료의 효율성을 세계 35위로 평가했다. 이는 말레이시아(7위).태국(12위).중국(23위) 등 아시아 경쟁국에 크게 뒤처지며, 멕시코(33위).인도(37위) 등과 비슷한 수준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IMD는 한국 기업의 경쟁력은 세계 23위로 평가했다.

미국 보스턴컨설팅그룹(BCG) 한국사무소의 이병남 부사장은 "그동안 정부가 기업개혁을 다그쳤지만 정작 정부부터 달라지지 않고는 국가경쟁력을 높일 수 없다"며 "기업의 경쟁력이 정부를 압도하는 상황에서 누가 누구에게 개혁을 강요하느냐"고 반문했다.

물론 과거보다 많이 달라졌다는 평가도 나온다. 마르코스 고메즈 주한 유럽연합(EU)상공회의소 회장은 "서울.인천시 등 지자체 공무원들이 경쟁적으로 외국인투자 유치에 애쓰는 것을 보면 희망도 엿보인다"고 말했다.

*** 정부 경쟁력 기업보다 못해

양수길 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대사는 "참여정부 출범 이후 외국인투자와 생활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여러 정책이 나오고 제도가 개선된 것은 사실"이라며 "그러나 벌써 일부 공무원 사이에서 '이만하면 되지 않았느냐'는 소리도 들린다"고 우려했다.

"공무원들 스스로 치열한 경제전쟁의 한복판에서 다른 나라 공무원들과 생존을 위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이젠 정책보다 실천이다."

중앙일보 비즈니스메카 자문단(BMAG)의 고언이다.

◇특별취재팀=김정수 경제연구소장, 양재찬.신혜경 전문기자, 이종태.김광기 경제연구소 기자, 이승녕.하현옥 정책기획부 기자, 홍주연 산업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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