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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이회창, 축복과 배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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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단군 이래 2인자 급 감투를 가장 많이 쓴 이는 누구일까.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다. 대통령 후보(두 차례), 총리, 집권당 총재, 제1야당 총재, 중앙선관위원장, 감사원장, 대법관…. JP(김종필)나 고건 전 총리도 입법·사법·행정·선관위라는 4부를 그처럼 종횡무진하진 못했다. 그는 대통령을 빼고는 대한민국으로부터 가장 많은 축복을 받은 인물이다.

그런 이회창씨가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그는 이명박 후보를 비판했다. 정직·법·원칙에 있어 국민이 불안하게 느끼고, 국가 정체성에 대한 신념이 불분명하다고 했다. 그는 이런 명분 뒤에 숨었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출마의 진실일까. 법과 원칙을 얘기하면서 자신이 이를 깨버리는 이중 행동…. 그는 도대체 왜 그럴까. 마음속엔 억울함과 고독, 그리고 생애 마지막 욕망이 숨어 있을 것이다. 그는 “아들 병역 문제는 1997년 심판 받았는데 2002년 사기꾼들 때문에 대권을 도둑맞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DJ는 신주단지처럼 모셔지고 YS는 MB(이명박)의 존경을 받고 박근혜는 당원의 사랑을 받을 때, 그는 남대문 시장 옆 적막한 사무실에 혼자 있었다. 그런 억울함과 고독을 세인이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억울함과 고독에 깔려 대쪽과 법치주의와 보수세력 단결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출마는 국가가 준 축복에 대한 배반이다.

억울함으로 따지자면 지구상에서 가장 억울한 정치인은 앨 고어 전 미국 부통령일 것이다. 2000년 11월 대선 때 그는 플로리다에서 0.006%포인트 차이로 부시에게 졌다. 만약 연방대법원이 수(手)검표를 중단시키지만 않았다면 그는 대통령이 됐을 것이다. 당시 고어의 나이는 52세. 이 나이에 연봉 17만 달러의 미국인이 주식투자를 하지 않을 확률은 1%라고 했다. 고어는 이 좁은 확률에 자신을 가둬 두고 있었다. 대통령 꿈 때문이었다. 그는 “공인의 주식투자는 오해를 부를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고어는 클린턴의 르윈스키 스캔들을 바로 옆에서 겪었다. 나중에 알려졌지만 그가 부통령실에 있을 때 클린턴은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젊은 여자와 황음을 즐기고 있었다. 고어는 자기처럼 도덕적인 인간은 대통령이 되고도 남는다고 믿었을 것이다. 실제로 백악관이 눈앞에 왔었다. 그런데 사라져 버렸다. 그래도 그는 깨끗이 물러났다.

2004년 대선이 다가오면서 사람들은 고어를 쳐다봤다. 평생의 집념으로 보면 고어는 당연히 재도전을 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불출마를 선언했다. 그는 “내가 부시 대통령과 재대결을 벌이면 선거전은 불가피하게 과거의 일을 끄집어 낼 것이다. 그러면 미래에 초점이 맞춰지지 못한다”고 했다. 과거의 일이란 물론 플로리다 재검표 파동이다. 속마음이야 어쨌든 이로써 그의 명분은 역사적인 것이 됐다. 워싱턴 포스트는 “대권 야망을 벗어던짐으로써 국가와 국민을 위해 훨씬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더 중요하고 강한 정치인이 됐다”고 평가했다.

그는 지구온난화를 고발하는 환경운동으로 올해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사람의 마음은 모르는 것이어서 2008년 대선에 그가 출마할 수도 있다. 그를 부추기는 지지자들도 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그는 자신이 공언했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회창씨는 “이명박은 불안한 후보”라고 하지만 증거가 없다. 이 후보의 지지율은 변동이 없다. 이 후보가 낙마해도 대안은 박근혜 전 대표지 자신이 아니다. 그러니 이 전 총재가 출마할 명분은 없다. 이제부터 아들 병역과 차떼기와 세풍(稅風) 사건이 다시 휘몰아 칠 것이다. 고어가 걱정한 플로리다의 추억보다 나라의 진로에 더 위험한 추억들이다. 그는 속으로 “추억보다 억울함이 중요하다”고 새기고 있을 지 모른다. 그러나 진짜 억울한 사람은 그가 아니다. 그를 지지했다가 두 번 정권을 잃었던 사람들이다.

김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