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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경쟁의 역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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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전두환 정권이 1982년 중·고교 교복 폐지 조치를 대국민 유화책이라고 내놓았지만 청소년들과 달리 주부들의 표정은 오히려 어두워졌다. ‘하복·동복 두 벌만 있으면 한 해를 거뜬히 견뎌 왔는데 웬 평지풍파냐’는 푸념이 터져 나왔다. ‘뭘 입혀 보내나’ 하는, 없던 고민이 생긴 것. 과외금지 조치로 전전긍긍하던 치맛바람 엄마들은, 자녀들의 ‘패션 경쟁’으로 새로운 골칫거리를 하나 더 안게 됐다.

경쟁은 좋은 것이다. 자유시장경제의 근간이라고도 한다. 우리 국민이 1인당 소득 2만 달러 언저리까지 온 원동력은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경쟁 심리 덕분이었다. 하지만 경쟁은 거추장스러울 때도 잦다.

젊은 여성들이 커 보이고 싶다고 모두 하이힐을 신는다면? 골고루 키가 커졌으니 돋보이긴 글렀고 관절염 후유증만 남을 것이다. 인기 팝 가수 비욘세의 공연장을 꽉 메운 팬들이 무대를 더 잘 보겠다고 앞다퉈 좌석에서 일어나 발을 동동 구른다면? 시야는 나아질 게 없으면서 공연 내내 서서 구경해야 한다. 미 코넬대의 로버트 프랭크 교수가 지적하듯 ‘과당경쟁의 역설’을 드러내는 이런 사례는 숱하다.

무한경쟁의 똑 떨어지는 예로 망국적인 사교육 열풍만 한 것이 없다. 명문대에 들어가려는 조기 선행교육 경쟁이 사회 전체로 엄청난 낭비와 비효율을 낳는다. 1955~63년생으로 진학·취업·승진 전선에서 사투를 벌여 온 우리나라 베이비붐 세대는 과도한 생존경쟁이 얼마나 지긋지긋한지 잘 안다. 인화를 중시한다는 동국제강은 신입사원 연수 기간에 시험을 일절 치르지 않는다. “동기애를 길러야 할 시기에 치열한 경쟁 분위기를 조성하는 건 옳지 않다”는 생각에서란다.

공정거래위원회에 ‘담합을 허용해 달라’고 하는 이색 민원이 최근 접수됐다. 신청인은 광주·전남 지역의 레미콘 업체 9곳. 부동산 경기가 엉망이라 서로 싸우다간 다 망하게 생겼으니 3년만 레미콘 생산량과 가격을 의논해 정하게 해 달라는 내용이다. 경쟁의 스트레스가 얼마나 심했기에 서슬 퍼런 공정 당국에 제 발로 걸어와 ‘자수’했을까 싶다.

하이힐의 뒷굽 높이기 경쟁처럼 우리나라의 사교육 경쟁은 수그러들 줄 모른다. 불편할 뿐만 아니라 해로운 경쟁이다. 역대 정권 어디도 이에 대한 묘책을 내놓지 못했다. 차제에 수백만 학부모가 사교육비 지출 상한선을 정하는 담합 성명이라도 내고 이를 들고 공정위를 찾아가면 어떨까. 답답한 마음에 이런 엉뚱한 상상을 해 본다.

홍승일 경제부문 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