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여성] 전업주부 VS 취업주부 '자식농사'를 말하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1면

각 대학이 합격자를 발표하는 요즘. 엄마들 몇명만 모이면 나오는 화젯거리 중 하나가 최근 발표된 서울대 입시 결과와 관련한 통계다. 요지는 2000년 입시에서 전업주부 1만명당 자녀 8명이 서울대 사회대에 합격한 반면, 취업주부의 자녀는 2명에 머물렀다는 것. 대학입시에서 전업주부가 취업주부보다 단연 경쟁력이 높다는 말이다.

이 문제를 놓고 지난 5일 본사 편집국에서 전업주부 김혜영(44)씨와 취업주부 김숙경(43)씨가 만났다. 얘기를 하다 알게 됐지만 이들은 25년 만에 만난 여고동창생이다. 이 자리엔 여성학자 박혜란(57)씨가 함께했다.

그는 세 아들을 과외 한번 시키지 않고 모두 서울대에 입학시킨 뒤 '믿는 만큼 자라는 아이들'이란 책을 써 장안의 화제가 된 아줌마 세계의 스타다. 수험생 엄마로서 겪는 답답한 심정과 취업주부와 전업주부 간의 보이지 않는 갈등, 공교육 붕괴의 현실까지. 뜨끈뜨끈한 얘기는 대보름날의 강추위를 녹이며 1시간30분을 훌쩍 넘겼다.

▶김숙경(이하 김숙)=직장 동료 한명이 서울대 발표를 보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는 말을 했어요. 막연한 생각이 통계로 입증되니 아찔하기도 하고 가슴이 답답하기도 하고 … .

▶김혜영(이하 김혜)=전업주부로서 안도감을 느낀 것은 사실이지만 결국 여자는 자식에게 매달려야 되는구나 싶어 씁쓸했어요. 이웃의 한 엄마는 '당신은 돈도 안 버는데 애 성적이 왜 나쁘냐'는 남편의 말을 듣고 엄청 스트레스 받았대요.

▶김숙=친구 한명은 2주 동안 해외 출장을 갔다 오니 초등학생 아이가 수학점수로 30점을 받아왔더래요. 애 선생님에게서 '아이 공부를 봐줘야지 웬 출장이냐'고 야단을 맞고 난 뒤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어요. 기사 보고 직장 그만 두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박혜란(이하 박)=직장이 있든 없든 엄마의 역할에 모두 강박관념을 많이 갖게 되지요? 이런 통계는 왜 발표를 하는 건지 … .(모두 웃음)

▶김혜=나는 열정적인 사람이라 직장을 간절히 원했거든요. 그런데 요즘 젊은 엄마들이 고민을 털어놓으면 '애나 잘 길러라'고 자신있게 말해요. 손익계산을 따져보면 분명하잖아요? 가정 형편이 힘들면 모를까, 아이가 잘 자라야 노년이 편해지잖아요.

▶박=나는 셋째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공부를 다시 시작했어요. 집에 있으면 애만 닦 달하게 될 것 같아서요. 그때부터 '방목'이란 말이 딱 맞게 아이들이 원하는대로 나뒀지요.

▶김숙=그 당시는 과외금지 시대 아니었나요? 선생님 사례가 '흘러간 옛 노래'로 여겨질 수도 있어요.

▶박=그때도 비밀 고액 과외가 얼마나 성행했다구요. 엄마들이 학원을 다닌 뒤 아이를 가르치기도 했어요. 나는 아예 과외 정보에 대해 알 생각을 안했어요.

▶김혜=엄마가 직장에 다니면 과외팀 짜는 네트워크에서 빠지게 돼요. 과외팀에 끼지 못하면 아이가 똑똑해도 성적이 잘 오르지 않아요. 직장 다니는 엄마들도 적극적으로 엄마들 모임에 끼어들어야 해요.

▶김숙=모임이 있는 줄도 모르는데 어떻게 끼어드나요. 어쩌다 학교 회의에 참가해도 아는 사람이 없으니 외톨이가 되고, 집에 돌아와선 밤새도록 고민해요. 하지만 아침에 출근하면 일에 빠져 잊어버리죠.

▶박=전업주부들이 취업주부를 '왕따'시키고 아이들도 따돌리는 예를 종종 봐요. 엄마가 직장에 다니면 아이가 게임에 빠지게 된다거나 빗나가기 쉽다고 여기지요. 반면 취업주부는 집에 있는 엄마들이 나보다 처진다는 우월감이 있어요. 한국의 엄마들은 모두 열등감과 우월감을 동시에 갖고 있어요.

▶김숙=후배 한 명이 직장을 그만둔 뒤 온갖 학원 정보를 꿰고 있어요. 그런데 자꾸 초조하대요. 요즘엔 다시 취업하고 싶다고 하더라구요. 어차피 공부란 아이가 하는 것 아닌가요. 우리 애는 학년이 높아지면서 독립심도 생기고 성적도 좋아져 위안을 얻고 있어요. 길게 보면 자립적으로 자란 아이가 더 경쟁력이 있지 않을까요?

▶김혜=뼈아픈 얘기지만 우리집에서 나는 간수고 아이들은 죄수라고 서로 놀려요. 컴퓨터 게임? 못해! 휴대전화? 빨리 끊어!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해요. 이런 감옥이 어디 있어요?(모두 웃음) 아마도 저뿐만이 아닐 거예요. 아이가 공부는 꽤 하지만 이렇게 키우면 창의성이 없어 21세기에 어떻게 살까 싶어요. 그래도 대학도 못 들어가면 안 되니 … . 대학 들어가는 날이 형기 끝나는 날이라고 아이와 서로 위로해요.(다시 웃음)

▶박=엄마가 하나부터 열까지 챙긴 아이가 장가가서 '엄마! 나 색시 오른쪽에서 잘까, 왼쪽에서 잘까?'하고 물어온다는 우스개 아닌 우스개가 있어요. 유학 갈 곳도 엄마가 정해줘야 할 만큼 의존적인 아이가 많다고 하지요. 엄마라는 직업에 너무 충실한 게 아이에게도 엄마에게도 모두 좋은 게 아니라고 봐요. 엄마는 아이를 위해 전심전력해도 아이 입장에서는 자기 인생이 뺏겼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아요.

▶김혜=공교육이 붕괴돼 교육의 책임이 엄마에게 전가되는 게 문제라고 봐요. 사실 전업주부가 최상의 선택이라고 생각하는 여성들이 몇 %나 되겠어요.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엄마들이 아이를 통해 대리만족을 느끼려고 아이들을 들볶는 거지요.

▶박=전국에 강연을 다니면서 만난 엄마들에게서 '지나고 보니 애들을 그렇게 잡는 게 아니었는데, 나를 위한 자기 개발에 좀더 투자할 걸'하는 말을 많이 들어요.

▶김숙=나도 그 점에 동의해요. 힘들다 해도 직장 생활을 하면 사회의 일원이라는 자부심을 느껴요.

▶박=나는 영원한 전업주부도 영원한 취업주부도 없다고 생각해요. 요즘 같은 세상엔 전업주부와 취업주부를 왔다 갔다 하면서 살게 되지요. 남자도 그렇잖아요. 취업.전업 주부를 갈라서 생각할 게 아니라 상대방은 내가 가지 않은 길에 선 자신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김숙=맞아요. 공교육이 제 기능을 못하니 여자들에게 짐을 지우고 편을 가른 뒤 자꾸 경쟁시키는 거예요.

▶박=나는 오래 전부터 주부연대가 매우 필요하다고 생각해 왔어요. 한 아파트에 사는 애가 목에 열쇠 목걸이를 걸고 있으면 데리고 가서 숙제도 봐주고 보살펴주고요. 우리 애가 같이 놀면 독립심이 생기겠구나라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김혜=연대가 되려면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품앗이가 돼야겠지요. 이웃에 교수인 엄마가 있는데 입시제도 등을 매우 거시적인 안목에서 봐요. 많이 배워요. 자원봉사할 곳도 예약해주고요. 저절로 서로 돕게 돼요.

▶김숙=취업주부도 주말에 시간 있을 때 이웃의 아이까지 데리고 박물관에 간다든지, 체험학습을 하면 되겠네요.

▶김혜=취업주부들도 너무 주눅들 필요가 없어요. 적극적으로 물어오면 마음을 활짝 열고 학원정보를 알려줄 엄마도 많아요.

▶박=답답했던 마음이 좀 풀리나요? 교육 문제가 풀려야 이 땅의 주부가 행복해질 것 같아요. 반대로 여성들에게 일자리를 많이 주면 교육 문제도 반은 풀릴걸요.어때요? 교육부 장관이 귀담아 들을 얘기 아닌가요?

정리=문경란 여성전문기자<moonk21@joongang.co.kr>
사진=박종근 기자 <jokepark@joongang.co.kr>

<참석자>

◇박혜란=57.여성학자. 가수 이적의 엄마로도 유명하다. '믿는 만큼 자라는 아이들' '여자와 남자'란 스테디셀러를 썼다.

◇김혜영=44.본사 명예주부통신원. 결혼 18년째로 올해 고3.고2가 되는 두 아들이 있다.

◇김숙경=43.한국 듀폰 홍보부장. 21년간 직장을 다녔다. 중3.초등학교 6학년 남매의 엄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