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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가 간섭 안 하니 히트작 나와”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3호 24면

지난 9월 새로 문을 연 닛산의 디자인센터 내부 모습.

일본 닛산자동차가 경영 부진을 털고 재기한 2002년 자동차 평론가와 소비자들 사이에서 ‘디자인이 많이 좋아졌다’는 평을 받았다. 닛산은 2000년 카를로스 곤 회장이 부임한 뒤 재무 개선에 최우선을 둬 적자 상태에서 벗어났다. 이후 업계의 주목을 받으며 지난해 370만 대를 팔아 현대자동차그룹과 세계 7, 8위를 다투고 있다. 매출은 현대차의 두 배에 달한다.

닛산 자동차 부활 원동력 아쓰기 디자인센터를 가다

이 같은 닛산 부활의 원동력이 된 디자인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곤 회장은 “디자인은 전문가인 디자이너에게 맡기고 (나는) 새로 나온 신차가 잘 팔릴 수 있도록 지원해주는 게 임무”라고 말한다. 예전 일본인 경영진들이 일일이 디자인에 이러쿵저러쿵 간섭했던 것과 다른 이야기다.

닛산이 10년 만에 새로 내놓은 최고급 스포츠카 `스카이라인 GTR`. 유선형 디자인에 450마력을 내는 3.5L 터보 엔진을 달고 포르셰 스포츠카보다 빠른 속도를 낸다. 일본 판매가격은 777만 엔(약 6300만원).

닛산의 디자인 산실로 올해 9월 새 단장한 디자인센터는 일본 도쿄 시내에서 한 시간 반 거리인 가나가와(神祭川)현 아쓰기(厚木)에 위치해 있었다. 이곳은 ‘프로젝트 이미지네이션 팩토리(PIF:Project Imagination Factory)’라고 부른다. 상상력을 현실화하는 곳이라고 할까. 희한한 모양의 컨셉트 카를 수년 후에는 길거리에서 볼 수 있다는 뜻이다.

한적한 산자락에 둘러싸인 이곳은 프랑스 파리 근교에 위치한 르노 디자인센터의 장점을 벤치마킹했다. 건물과 건물 사이는 다리 형태의 복도로 연결했고 자연채광을 최대한 활용했다. 디자이너들의 색감을 좋게 하기 위해서다. 디자인센터에는 1957년 설계부에 근무한 2명으로 시작해 지금은 900명의 디자이너가 근무한다. 이곳 이외에 일본 하라주쿠, 미국 샌디에이고와 디트로이트, 영국 런던, 대만 등에 총 6개의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다. 아쓰기의 PIF는 이들 스튜디오를 총괄하는 닛산 디자인의 심장부인 셈이다.

하시모토 마사히코(橋本正彦) 디자인 프로젝트 매니저는 “곤 회장은 신차 개발 중간중간에 클레이 모델(흑으로 만든 모형)을 보고 조언을 하지만 ‘디자인을 이렇게 고쳐라’ 하는 식의 주문은 하지 않았다”며 “디자이너에게 디자인을 돌려준 것이 가장 큰 공헌”이라고 말한다. 90년대 닛산 경영진은 유선형 추세가 대세인데도 “닛산 디자인 특질은 긴 직선”이라며 디자인을 바꿨다. 결과는 판매 부진으로 이어졌었다.

곤 회장은 취임하자마자 나카무라 시로(中村白) 디자인총괄 수석부사장을 영입했다. 영국 왕립디자인학교 출신으로 유창한 영어로 곤 회장의 눈에 띄었다. 이스즈자동차에서 픽업 트럭과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을 디자인했다. 그는 기존 닛산의 특징인 긴 직선의 간결함(simple)에 날렵한 유선형을 가미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부진을 면치 못하던 닛산은 신형 스카이라인(스포츠카 형태)·페어레이디Z(2인승 컨버터블)·인피니티 FX(크로스오버유틸리티차량) 같은 혁신적인 유선형 차량에 이어 사과상자 몇 개를 올려놓은 듯한 박스형 큐브 등 히트작을 잇따라 내놓았다. 특히 2002년 나온 티아나(르노삼성 SM7의 기본 모델)의 실내 인테리어는 고급 호텔과 같은 거주공간을 옮겨놓은 듯해 일본 자동차 업계에 큰 영향을 줬다.

‘룸 700’이라고 씌어진 방은 최종 디자인을 전시한 후 경영진들과 디자이너들이 품
평회를 하는 곳이다. 내년 한국에 들어올 대형 SUV인 무라노의 신모델이 전시돼 있다.

디자이너들이 근무하는 작업공간으로 향했다. 르노와는 달리 상당히 사무적인 분위기 속에 일본식 정숙성과 단정함이 그대로 감지됐다. 디자이너의 책상에는 습작한 자동차뿐 아니라 사람의 이동공간과 관련된 스케치로 가득했다. 클레이 모델 룸에는 진흙으로 만든 인피니티 G37쿠페가 제작되고 있었다. 클레이 제작은 디자이너가 구상한 이미지를 입체감 있는 3D 형태로 만든 뒤 실제 차량 색깔과 같은 비닐 필름을 부착해 차체의 볼륨과 색감을 확인한다.

현대·기아자동차 디자인에 대해 나카무라는 “컨셉트 카를 보면 차체 밸런스, 비율 등이 눈에 띄게 발전하고 있다”며 “특히 한국 디자이너들은 세부 디자인(디테일)에 강하다”고 말했다. 이어 “닛산 디자인센터에는 한국에서 대학을 나온 20대 디자이너 10여 명이 근무하고 있는데 모두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전체적인 시설에서 현대차와 큰 차이는 없다. 결국 경영진의 디자이너에 대한 신뢰와 디자이너의 실력이 가장 큰 경쟁력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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