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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을찾아서>윤영수 소설 "사랑하라,희망없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3면

…아버지는 없다.가부장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그는 위엄을 지키지만 가족내에서 그 역할을 다하진 못한다.아들에게 아버지는권위의 상징일뿐 친근한 인간으로 다가오지 않는다.아버지는 어머니에게도 모셔야될「상전」이다.어머니는 밭을 갈고 ,밥을 짓고 아들을 낳아 기른다.좌절된 자신의 삶에 대한 한을 아들에게 맹목적인 사랑을 쏟아부으면서 발산한다.아들은 관념 뿐인 아버지의권위와 어머니의 맹목적인 모성을 먹고 성장한다.그래서 부엌에도못들어가게 하면서 「사내」로 기르 려 했던 어머니의 바람을 저버리고 실제로는 유아 혹은 여자로 성장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회가 부여해준 남자의 관념을 뒤집어 쓴다.그가 결혼을 하면 이 관념이 가장으로 기능하며 다시 유사한 가족구조를 만들어 낸다.… 성장소설에서 흔히 보여지는 우리나라 가족의 원형은대략 이런 식으로 요약된다.90년 서른아홉의 나이로 등단한 늦깎이 작가 윤영수(43)의 첫 소설집『사랑하라,희망없이』의 가족구성도 이와 유사하다.다른점이 있다면 윤영수는 철저하게 일그러진 가족을 모델로 삼는다는 점이다.
등단작인「생태관찰」은 고교 교장인 박길호의 정실.첩실 그리고각각에서 난 두 딸로 가족이 구성된다.박길호는 두 아내와 두 딸에게 말할 수 없는 상처를 남겨준 인물이지만 두 아내는 그를공격하지 않고 서로 싸운다.
「올가미 씌우기」에서는 씨받이로 들어간 여인이 그대로 눌러 앉는 상황이 설정된다.작중화자의 생모인 이 여인은 남편의 살인적인 학대에도 남편을 미워하지 않고 본부인에 그 원망의 화살을돌린다.그리고 본부인이 소유하지 못한 아들에 대 해 한풀이식의눈먼 사랑을 퍼부은 나머지 아들과 근친상간의 늪에 빠진다.그러나 작가는 이 가족모델을 통해서 아무런 사회학적인 메시지를 전하지 않는다.작가에게 가족은 세상을 바라보는 창에 불과하며,작가는 거기에 투영된 세상의 속살이 터져나오도록 하기 위해 창을찌그러뜨리는 기법을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진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빨간 사과의 속살이 희고 녹색 수박의 과육이 빨갛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지요.당연한 것이 낯설게 보이는게 일상이고,인간이 쉽게 안주하는 편견이 아닌가 싶어요.』 윤영수는 근엄한 인간의 뒤를 응시하고 정신병자의 말을 경청한다.「올가미씌우기」에서 작가는 근엄한 체하는 김과장의경박스러움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과대망상증 환자의 말에서 올바름을 찾아낸다.「바람의 눈」에서는 가족의 우애로 위장된 현 장에서 구성원이 어떻게 자기만을 챙기는가를 예의 주시하고 있다.「잔일」에서는 죽음을 앞둔 양로원내 두 노인의 진정한 사랑을 보여주면서 이들을 사랑할법한 관리실 경비원과 사무실직원이 촌지를요구하고 관료적인 태도를 보이는 장면을 대비 시켜 사랑의 주객이 전도된 삭막한 풍경을 보여준다.
한마디로 윤영수는 대비되는 사물의 겉과 속을 동일선상에 놓아모든 대상을 모호하게 만들어 버린다.이 모호함을 통해 작가는 도덕적 가치판단을 유보시키며 삶에 대한 새로운 통찰의 공간을 확보한다.그리고 그 공간에서 그는 말한다.근원적 인 비극성을 인정하며 사랑하라.사랑하라 희망없이.
〈南再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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