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해는뜨고 해는지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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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제1부 불타는 바다 땅끝에 선 사람들(58) 『무슨 말씀이신지요?』 가와무라는 뚫어져라 길남을 내려다보았다.
『사나이란 약속을 지킬 때 붙여지는 이름이야.약속이란 다른게아니지.그건 서로의 비밀을 지키는 거 아니겠냐.』 말해놓고 나서 가와무라는 길남이 앉아 있는 의자 주위를 천천히 걸었다.마루바닥을 울리는 그의 발소리가 털썩털썩 가슴에 떨어지는 것 같은 순간을 길남은 이를 악물고 앉아 있었다.
『너 내 사람이 돼서 일 하지 않겠나?』 『제가 말입니까? 무슨 일을….』 가와무라가 길남의 말을 잘랐다.
『지금 대답할 거 없다.그리고 이 방에는 너와 나 밖에 없기때문에 다른 걱정을 안 해도 된다.이 일이 다른 사람에게 알려진다 하면 그건 네 입을 통해서가 아니겠냐,그렇지?』 무엇으로날 얽으려고 하는 건가.길남은 눈을 가늘게 뜨며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잘 하면 넌 막장에 내려가는 일을 안 하게 될 수도있어. 내가 노무계에 일을 하게도 해 줄 테고.』 걸려도 크게걸리는 구나.날 보고 저희들 앞잡이가 되라는 거 아닌가.길남이벌떡 일어섰다.
『고맙습니다.』 그는 허리를 꺾어 고개를 숙이며 가와무라의 구두를 내려다보았다.천천히 얼굴을 들며 길남이 말했다.
『그러나,저는 아는 게 없습니다.이제까지처럼 열심히 석탄 캐는 일을 하겠습니다.』 두 사람의 눈길이 허공에서 얽혀들었다.
이럴 때 어떤 얼굴을 하는 걸 너희들이 좋아하는지를 모르는 내가 아니다.일본사람 밑에서 찬바람 맞으며 식은 밥 먹은게 몇 년인 줄 아느냐.길남이 다시 한번 깊게 고개를 숙였다.
『정말로 고맙습니다.』 삼밭에 한번 똥 싼 개는 평생 저개 저개 소릴 듣는다고 했다.다른 놈이 싸도 늘 그 개가 싼 줄 아는 거지.한번 이놈들 눈에 띄었으니 시도 때도 없이 눈꼬리가날 쫓아다닐 건 뻔한데….큰 일은 큰 일이로구나.길남이 눈길을내리깔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겨울에는 털가죽 옷을 입고 여름에는 베옷을 입는 거야 당연한거지.그런 말을 하면서 다들 일본 편에 섰었다.그러나 왕후장상에 씨가 있냐고 했지만,아무렴,씨가 있는 거다.아무나 왜놈 앞잡이가 되는 게 아니다.될 놈이 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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