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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T·IT에 방사선 쬐니 돈이 보이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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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

방사선은 오래전부터 X레이 촬영에 활용돼 왔다. 1960~70년대 그 활용 범위는 다른 산업으로 확산된다. 방사선을 쪼여 새로운 품종을 만들어 내거나, 물체를 실제로 쪼개보지 않고도 물체 안의 균열을 찾아내는 검사를 할 때 이용된 것이다. 최근 방사선 기술은 다시 도약하고 있다. 생명과학(BT)·정보기술(IT)·나노과학·우주과학과 만나면서 새로운 기술혁명을 일으키고 있다. 이른바 ‘방사선융합기술(RFT·Radiation Fusion Technology)’ 시대가 열린 것이다. 전북 정읍시의 방사선과학연구소(소장 변명우)는 국내 방사선 기술 연구의 메카다. 지난해 9월 한국원자력연구원 산하 기관으로 문을 열었다. 그동안 이 연구소에서 개발했거나, 진행 중인 기술을 중심으로 RFT의 세계를 살펴본다.

개발 중인 김치·수정과·생식바·우주라면(왼쪽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골프광인 K씨에게는 큰 고민이 있다. 친한 대학친구와 자주 라운드하지만 항상 비거리에서 뒤지기 때문에 자존심을 구길 때가 많다. 그는 얼마 전 비장의 무기를 준비했다. 방사선을 쪼인 골프공이 그것. 일명 ‘존 댈리 골프공(대표적인 장거리 프로골퍼의 이름을 땄다)’으로 불리는 이 공은 일반 공보다 최대 10%까지 더 멀리 날아간다고 한다. 골프공에 방사선을 쬐면 공에 함유된 수많은 탄소 분자가 서로 연결돼 탄성률이 올라가면서 딤플(공 표면의 작은 홈)이 받는 공기 저항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K씨는 다음 라운드에서 친구의 콧대를 꺾을 생각에 부풀어 있다.

2003년 개봉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헐크’는 방사선의 부작용을 영화의 모티브로 사용했다. 방사선 연구를 하던 한 과학자가 실험실에서 감마선(방사선의 한 종류)에 노출돼 초능력을 가진 녹색 괴물 인간으로 변신한다. 방사선이 과학자의 유전자 구조를 바꿔 새로운 생명체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하지만 영화의 이런 설정은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다. 과도한 양의 방사선에 직접 노출되면 죽거나 암에 걸리기 때문이다.

이처럼 영화 속에서 방사선은 괴물을 만드는 섬뜩한 광선으로 표현되곤 한다. 하지만 ‘존 댈리 골프공’의 예처럼 방사선은 이미 우리 실생활 깊숙이 들어와 있다.

다리미 전선이나 자동차 내부 전선에 방사선을 쪼이면 열에 잘 견디는 전선으로 탈바꿈한다. 몇 년 전 TV 광고에 등장해 주목받았던 ‘레이디얼 타이어(Radial Tire)’도 좋은 예다. 일반 타이어에 방사선을 쪼여 잘 닳지 않고 오래 가는 특징을 갖게 한 것이다.

세계 세 번째로 우주 식품 개발

▶우주기술=내년 4월 러시아 소유스호를 타고 우주에 갈 고산씨는 우주에서 김치를 먹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RFT 덕분이다. 방사선과학연구소는 최근 식품회사 등과 공동으로 방사선 처리를 한 우주 라면·김치·생식바·수정과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우주 식품은 장기간 보관해도 쉬지 않고 신선한 상태로 보관이 가능하며 맛과 영양소를 그대로 지니고 있다. 현재 러시아에서 우주 식품으로 적당한지 검증하고 있다. 이 과정이 끝나면 우리나라는 미국과 러시아에 이어 세계 세 번째로 우주 식품 개발 국가가 된다.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는 방사선을 쪼인 식품이 시중에 판매되고 있지 않지만 미국 등에서는 방사선 처리를 한 식품이 유통되고 있다.


각종 알레르기 백신 만들어

▶의료=국내 어린이 100명 중 6명꼴로 나타나는 달걀 알레르기는 구토나 어지럼증·소화불량을 일으킨다. 얼마 전 연구소는 계란 알레르기를 없애는 백신을 개발했다. 식품생명공학연구팀 이주운 박사는 “달걀 알레르기를 유발하는 물질은 흰자에 주로 들어 있는 ‘오밸부민(ovalbumin)’이라는 단백질”이라며 “방사선을 쪼여 이 단백질의 구조를 바꿨다”고 설명했다. 현재 임상시험 중인 이 백신은 이르면 2010년 정식 의약품으로 시판될 예정이다. 연구팀은 최근 우유·땅콩·집먼지 알레르기 백신 개발에도 들어갔다. 몸에 이식하는 인공 고관절은 7~8년이 지나면 마찰 부위가 닳아 다시 시술해야 하는 불편이 있다. 의료기기 분야에서도 방사선의 활용도가 커지고 있다. 방사선으로 표면을 처리해 잘 닳지 않는 인공 고관절은 이미 개발됐다. 최근에는 아토피성 피부염 치료 효과가 있는 겔(gel)을 합성하는 연구도 진행 중이다. 방사선공업환경연구팀 강필현 박사는 “앞으로 새로운 의약품과 의료기기 개발에 방사선 기술이 더 널리 쓰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황금 줄무늬 지닌 高價 난초 탄생

▶생명과학=연구소는 지난해 ‘심비디움’이라는 수입 난초에 방사선을 쪼여 새로운 품종인 ‘동이’를 개발했다. 동이는 수입 난초보다 잎 크기가 작고 잎 가장자리에 황금색 줄무니가 선명하게 들어가 있다. 가격은 30만원대로 시중에서 6만~10만원에 팔리는 일반 심비디움의 3~5배다. 일본에 수출되고 있다. 방사선육종연구팀 강시용 박사는 “돌연변이를 일으키는 방사선을 식물에 쪼이면 강한 에너지가 전달돼 식물의 유전자 구조가 바뀔 뿐 방사선 자체는 식물에 남지 않아 안전하다”며 “방사선 기술로 식물종자 로열티의 해외 유출을 막을 수 있을 뿐 아니라 고부가가치 신품종 수출도 가능해졌다”고 설명했다.

미백 효과 탁월한 화장품 개발

▶생활=하얗고 주름살 없는 피부에 관심이 많은 여성에게도 RFT는 유용하다. 연구소는 녹차에서 노화 방지와 미백 효과가 있는 성분을 검출한 다음 방사선을 쪼인 기능성 화장품을 개발했다. 이 화장품은 일반 기능성 화장품보다 녹차의 함유 농도가 100배 정도 높아 피부에 큰 효과가 있는 것으로 임상시험에서 입증됐다.

또 항암 성분을 가진 건강 기능식품을 내놓았다. RFT를 이용해 당귀·천궁·백작약 등 생약재에서 우수 성분만을 추출, 개발한 것이다.

미국 식품의약국(FDA) 검사에서 농약·중금속 등 독성 물질이 검출되지 않아 안전성을 입증받았고 국내 특허 2종을 등록한 데 이어 미국·영국·독일·프랑스·이탈리아 등에서 특허 등록까지 마쳤다.

이 건강식품은 5월 식품의약품안전청의 허가를 받아 시판에 들어갔다. 화장품·건강보조식품 특허를 바탕으로 연구소는 민간 업체와 공동 투자해 연구소 형태의 민간 기업을 설립했다. RFT 실용화의 새 모델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밖에 RFT는 산업 폐수·축산 폐기물을 안전하게 처리하고, 식중독균을 제거하는 데도 쓰이고 있다.

정읍= 고성표<3795@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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