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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정원 속에 갇힌 대북 정책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2호 27면

우리는 마치 영화 ‘메멘토’의 주인공처럼 단기 기억상실증을 갖고 있는지도 모른다. 얼마 전 떠들썩했던 신정아씨 사건은 이미 우리의 관심 밖이다. 지난여름에 있었던 아프간 인질 사태는 이미 우리의 기억을 떠난 지 오래다. 얼마 전 깜짝 등장했다가 사라져버린 남북 정상회담도 마찬가지다. 정치인들은 이해관계에 따라서 한편에서는 이러한 단기 기억상실증에 안도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아쉬워한다. 하지만 정치인들의 계산에 따른 희비와 별개로, 남북관계는 우리가 껴안고 살아가야 하는 삶의 문제다. 대북 정책이란 궁극적으로 우리가 누구인가의 문제며, 우리가 미래에 어떤 모습을 갖고 싶은가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민주화 이후 대북 정책의 가장 큰 특징은, 대부분의 외교정책 결정이 개방화의 혜택을 누리고 있지만, 유독 대북 정책만은 여전히 비밀의 정원 속에 갇혀 있다는 점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이라크에 국군 파병을 결정할 때, 진보적 시민단체들은 격렬하게 파병 반대 운동을 벌였고 이는 실제로 파병 규모나 파병 부대의 성격을 좌우하였다. 또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은 농민단체를 포함한 여러 이익단체가 활발하게 의사를 표현하는 가운데 추진되었다. 이에 반해 노무현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하기 전까지 정상회담의 구체적인 시기나 의제는 누구나 접근할 수 없는 비밀이었다.

굳이 2000년 정상회담 추진과정에서 빚어졌던 대북 비밀송금과 그에 따른 사법처리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대북 정책에 토론과 협의, 검증이라는 햇볕을 비추어야 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첫째, 남북관계를 다루는 법의 정비가 미비한 상태에서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정상회담의 역사성을 내세우며 불법송금 행위를 옹호하려 애썼다. 그러나 대북 정책이 일종의 치외법권처럼 여겨질 때, 정치적 계산이나 동기가 포용정책의 원칙을 압도할 가능성은 커진다. 역사성과 특수성이라는 방패 뒤에 숨는 대북 정책은 편의적으로 흘러갈 위험이 높고, 결국 국민의 폭넓은 지지를 얻기는 어려워진다.

둘째, 대북 정책의 과도한 비밀주의가 대북 정책의 당파성을 심화하고 있다. 북한의 개혁·개방을 돕고 북한 시민들의 삶을 돌보려는 의지에서 출발하였던 대북 포용정책은 오늘날 당파적인 정치행위로 전락하고 있다. 마치 임진왜란 직전 일본의 사정을 살피고 온 통신사들의 보고가 당파에 따라서 처절하게 갈렸던 바와 같이, 오늘날 북한을 보는 우리의 눈은 철저하게 보수와 진보 이념의 색안경으로 덧씌워지고 있다. 개혁·개방에 대한 북한의 의지, 북한 핵의 실체와 의도에 대한 우리의 해석은 이념적 당파성에 따라서 철저히 분열되어 있다. 물론 이러한 극심한 당파적 분열의 이면에는 그간의 심각한 비밀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

우리의 대북 정책에 투명성과 개방성이라는 햇볕을 비추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가지의 변화가 시급하다. 첫째, 정상회담을 포함한 대북 정책의 추진과정, 의제, 합의사항은 국회의 세밀한 통제를 받아야 한다. 대북 정책이라는 자동차의 운전석에 대통령과 국회가 함께 탈 수는 없겠지만, 국회가 조수석에 앉아 차의 진행방향과 속도를 면밀하게 감시할 수 있어야만 한다. 굳이 남북관계 발전법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지난 2차 정상회담에서 논의된 여러 사항은 국회에 면밀하게 보고되고 또한 국회의 동의를 거쳐야만 한다.

둘째, 어떠한 제도개혁보다도 절실한 변화는 아마도 지적 정직성(intellectual honesty)의 회복일 것이다. 미국 외교협회장을 지낸 바 있는 레슬리 겔브는 지적인 정직성을 갖추지 못한 미국의 외교정책 시스템은 역설적으로 그 자체가 미국 스스로에 대한 최악의 적이 될 수 있다는(Our own worst enemy) 점을 신랄하게 경고한 바 있다. 우리의 경우에도 북한전문가, 통일·외교부 관료들이 북한의 현실, 목표, 미래에 대한 판단에 있어 자신들의 지적 정직성을 한번쯤 돌아보는 것이 당파성이라는 역사의 짐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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