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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닥 얇은 가사는 태산처럼 무겁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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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늦가을 차가운 장대비가 내리는 가운데 두 손 모아 합장하고 용맹정진을 다짐하는 스님의 얼굴에 참회의 물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있다. [문경=김성룡 기자]

"우리의 정당성을 주장하기에 앞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볼 때입니다."(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

19일 오전 11시 경북 문경의 봉암사에서 '봉암사 결사(結社) 60주년 기념 법회'가 열렸다. 1000여 명의 승려와 9000여 명의 신도 등 1만여 명이 참석, 최근 불교계 사태에 대한 자성과 '참회'의 목소리를 높였다.

최근 '변양균-신정아 사건'을 통해 드러난 불교계 일각의 자화상은 '승가'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마곡사와 관음사 사태에선 주지 선출과 사찰 운영에 대한 문제점도 드러났다. 그렇다고 이들이 불교계의 다수도 아니다. 수행과 거리가 먼 소수의 승려가 불교계 전체를 욕 먹이는 현실이다.

이날 봉암사 법회를 연 까닭도 여기에 있었다. 대웅전 앞 계단에 '부처님 法(법)대로 살자'는 현수막을 건 것도 이 때문이었다. 봉암사 결사 정신을 통해 '정치와 계파, 알력과 갈등'으로 점철된 '오늘의 종단'을 돌아보자는 취지였다.

법회 시작과 함께 장대비가 쏟아졌다. 대웅전 앞마당에 선 1000여 스님의 가사가 흠뻑 젖었다. 우산이 없는 신도들도 자리를 뜨지 않고 '반야심경'을 독송했다. 그 빗줄기를 뚫고 선원 수좌들의 '외침'이 터졌다.

봉암사 주지 함현(涵玄) 스님은 "봉암 대중은 크나큰 책임감을 통감한다. 한 사발의 맑은 죽이 씀바귀처럼 쓰고, 한 가닥 얇은 가사(袈裟)는 태산처럼 무겁다"며 최근 조계종 사태에 대한 수좌들의 침통한 심정을 밝혔다.

종단 내 문제점을 향해 함현 스님은 "개혁이란 명분으로 실시되고 있는 선거법을 철폐하고 공의(公議)에 의한 화합선풍 진작, 승가를 오염시키는 정치적 파벌화 일소, 청규에 의한 수행풍토로 복귀할 것"등을 주장했다.

이날 법회에 참석한 한 수좌 스님은 "주지 선출이나 계파 정치, 수행과 담을 쌓은 행위 등을 견제하기 위한 종단 내 제도적 장치가 절실하다"고 밝혔다.

종정 법전 스님도 법회에서 법어(法語)를 내렸다. "곧은 것과 굽은 것을 모두 놓아 버리면 시방의 종지가 한 곳으로 모일 것이요, 정(正)과 사(邪)의 시비가 원융(圓融.모든 법의 이치가 완전히 하나가 되어 구별이 없어짐)을 이룰 것이다." 최근 사태를 염두에 둔 법어였다.

총무원장 지관 스님은 기념사에서 "60년은 세속에서 환갑의 세월에 해당한다. 그 세월 속에 우리가 봉암사 결사의 뜻을 쇠잔하게 만들었다면 선사(禪師)들에게 큰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관 스님은 또 "추상 같은 계율과 수행 가풍을 이어가는 조계종단을 만들자"고 강조했다.

결사정신 복원을 향한 신도들의 바람은 절절했다. 중앙신도회 김의정 회장은 "언제부터인가 불자들은 조언보다 비판을 즐겨 했고, 작은 테두리에 안주하며 수행을 게을리한 것도 사실"이라며 "스스로 뼈를 깎는 자자포살(自恣布薩.대중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는 의식) 없이는 아집과 갈등을 절대로 없앨 수 없다"고 밝혔다.

행사에 앞서 일부 청년이 봉암사 입구에서 '조선일보 구독 거부' 서명운동을 시도했으나 봉암사 주지 스님의 만류로 무산됐다. 봉암사 경내 남원루 앞에선 청년들이 '조선일보 구독을 거부합니다'라는 팻말을 들고 서 있기도 했다. 조계종은 "변양균.신정아 사건을 놓고 조선일보가 불교계를 음해, 왜곡했다"고 구독 거부 운동을 펼치고 있다.

봉암사 일주문으로 나가는 길에 현수막이 하나 걸려 있었다. 나무 사이에 걸어 둔 봉암사 수좌들의 뜻이었다. '선(禪)의 정신은 간소함'. 어찌 보면 그곳에 답이 있었다. 문제는 '실천'이었다.

문경=백성호 기자, 사진=김성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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