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블로그] 가방을 든 남자, 손학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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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학규 전 후보를, 9월11일 대통합민주신당 토론회에서 만났습니다.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지는 못했지만, 여타 대선 후보와는 다른 특징 몇 가지를 단박에 눈치 챘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단순히 그의 첫인상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그의 진짜 본 모습이었는지 확신하기가 힘들어서 몇 차례 더 만나볼 작정이었습니다. 그 일을 차일피일 미루던 차에 민주신당의 경선이 마무리돼 버렸습니다. 손학규 후보가 전 후보가 돼 버린 것이죠. 그래서 비록 때를 놓치고, 그의 실험이 실패로 끝나기는 했지만, ‘블로그에서 대선주자를 만나다’ 시리즈를 완성시킨다는 점과 저의 인상평을 기록해두는 것이 도리라는 생각이 들어서, 이렇게 올리고자 합니다.

손학규 후보가 외형상 다른 후보와 확연히 차이가 나는 것은, 그가 직접 들고 다니는 가방이었습니다. 다른 후보의 경우 수행원들이 가방을 들고 다니는 것과는 달랐습니다. 각종 자료와 서류가 가득 들어 배불뚝이가 된 그 가방은 비싼 명품 가방도, 싸구려 가짜 가죽 가방도 아니었습니다. 적당한 가격에, 적당한 품질. 오랜 세월에 겉이 헤졌지만, 그의 경륜과 심사숙고를 짐작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꼭 연륜 있는 교수님의 가방,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손 전 후보가 가방을 직접 드는 것을 고집한 이유는 확실치 않습니다. 누군가의 시중을 받는 권위적인 인상을 피하고 싶었을 수도 있고, 무슨 일이든 직접 달려들어 한다는 열정적인 이미지를 심고 싶었을 수도 있습니다. 민심 대장정이라는, 우리 정치사 초유의 개인적 여론 청취 방식을 선택했을 때부터 그는 뭐든 혼자 해내는 스타일이었고, 그것도 열정적으로 하는 유형이었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대선 후보로서 가방을 혼자 든다는 것이 과연 효과적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듭니다. 언제, 어디서 사람을 만나 악수나 포옹을 해야 할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즉 대선 후보로서 조직을 만들 궁리를 해야지 단기필마로 뛸 궁리만 할 일은 아니었다는 얘기죠.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핑크색 넥타이나, 로우퍼나 플레인토슈의 중간쯤 되는 그의 구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독창적이고 열정적인 모습이지만, 어딘가 남들과는 잘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아이디어 많고 에너지가 넘치는 교수님의 인상이지, 군중을 헤집고 다닐 정치가를 떠올리게 하는 모습은 아니었다는 얘기입니다.

설득력 있는 내용이지만, 조용하고 느릿느릿 하게 말하는 어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진정성이 느껴지는 교수님의 것이지, 대중을 움직이는 정치가의 사자후는 아니었습니다. 한 마디로 손학규 전 후보는 전례 없이 독창적이고 열정적인 후보였지만, 조직을 꾸리는 데는 실패한 후보이기도 했습니다.

노정객은 언젠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한때의 킹 메이커였던 김상현씨가 발언의 주인공이라는 것이 정설입니다). ‘기회(천)와 명분(지), 그리고 사람(인)을 얻는 사람’이 대권을 쥔다고 말이죠. 손 전 후보는 확실히 기회를 만났습니다. 범여권이 무주공산인 가운데 새 인물을 찾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명분이 약했습니다. 야당의 3등짜리 후보가 범여권 후보가 되기는 어려움이 있었던 겁니다. 무엇보다도 사람을 얻는 데 실패했습니다. 이성적이지만 냉소적인 오피니언 리더들의 호감을 얻는 데는 성공했지만, 열정적인 대중의 마음을 파고드는 데는 실패한 것입니다. 하늘의 기운은 얻었지만, 땅과 사람의 기분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무모한 실험과 도전은 끝난 게 아닙니다. 뒤늦게라도 명분과 사람을 얻을 때 그의 독창성과 열정은 다시 만개할 것입니다. 비록 그 결과물이 그가 꿈꿨던 대통령이란 자리는 아닐지 모르지만. 그래서 가방을 든 남자, 손학규 전 대선 후보는 아직도 미완의 대기입니다.

이여영 기자

대선주자들을 옆집 아저씨·아줌마 만나듯 보여드리겠다며 시작한 것이 벌써 네번째 동행에 이르렀습니다. 동행 당시 과연 대선 후보가 될 수 있겠느냐는 회의론도 많았지만 지금은 민주신당의 대통령 선거 후보가 된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 협조가 잘 되지 않아 취재에 어려움이 있었던 고건 전 총리, 그리고 포항과 대구에서 함께 한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누구는 아직 후보이고 누구는 전 후보가 돼버렸지만, 이 연재가 마무리되는 그날까지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겠습니다. 개인적인 호불호는 애초에도 없었고 취재 과정에도 절대 없을 것입니다. 대한민국 20대의 시각에서 공정하게, 속시원하게 그들을 만날 것입니다. 부족한 점이 많겠지만 블로그를 읽는 분들이 최대한 그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많이 느껴볼 수 있도록 발로 뛰고 또 뛰겠습니다.
블로그의 이름처럼 그들의 말과 맛, 그리고 멋을 보여드리겠습니다. 흔한 정치적 공약과 가식적인 모습이 아닌 제가 그림자처럼 동행하면서 직접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전하겠습니다. 이제, 블로그에서 대선 주자들의 더 친근하고 새로운 모습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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