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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 앞둔 공무원 '공로연수' 부부동반 해외 관광으로 변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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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프랑스 파리에서 개선문을 보고 몽마르트르 언덕에 오른 뒤 이탈리아로 이동한다. 3일간 머물며 로마 시내와 폼페이 고대 유적을 돌아보고 나폴리 항구의 아름다움을 만끽한다. 스위스 융프라우에 올라 만년설을 구경하고, 독일 하이델베르크의 고성(古城)을 감상한 뒤 귀국한다'.

지난해 11월 한 지방자치단체가 실시한 소속 공무원 19명의 '공로연수' 일정이다. 배우자 18명까지 모두 37명이 참가한 이 연수는 8박10일짜리 부부동반 유럽 여행이었다. 1인당 299만원씩 총 1억1063만원의 비용이 들어갔다. 모두 지자체 예산으로 처리됐다. 연수 계획서에는 "선진 행정 습득을 위한 해외사찰-선진국 퇴직 공무원의 사회 적응 및 봉사 실태 벤치마킹"이라고 명시돼 있다. 하지만 일정표는 온통 관광지로 채워졌다. 이 자치단체는 1994~97년 유럽으로 82명, 2003년 태국.홍콩 등 동남아로 8명, 2004~2005년 유럽으로 35명을 같은 명목으로 부부동반 공로연수를 보냈다. 방문할 나라는 참가자들의 다수 의견에 따라 선정됐다.

퇴직을 앞둔 공무원의 사회 적응을 돕기 위해 도입된 공로연수제가 취지와 달리 외유성 해외 여행으로 변질되고 있다. 중앙인사위원회가 마련한 공로연수 운영지침에 따르면 연수 내용은 '사회 적응 능력 배양을 위한 교육활동'으로 명시돼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지자체에서 퇴직을 앞둔 공무원의 위로 관광 정도로 운영하고 있다.

대통합민주신당의 정성호 의원이 행정자치부로부터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2005~2006년 전국 광역.기초 자치단체에서 퇴직 예정자의 해외 연수 비용으로 111억9798만원이 지출됐다. 부부의 동반 여행도 허용된다. 이 기간 지자체 공로연수 대상자 공무원 4242명 중 해외로 나간 인원은 4038명(배우자 포함)이었다. 2005년에 31곳, 2006년에는 38곳의 지자체에서 공로연수자 대상자보다 해외 연수자 수가 많은 일까지 벌어졌다. 배우자와 함께 여행을 떠났기 때문이다.

서울시(각 구청 포함)의 경우 같은 기간 1214명(배우자 포함)을 해외에 내보내 연수비로 예산 43억여원을 사용했다. 2006년 상반기까지 모든 공로연수자에게 국내외 연수비 명목으로 일괄적으로 300만원을 지급했고, 영수증 처리 등 사용 내역에 대한 사후 검증은 이뤄지지 않았다. 한 지자체 관계자는 "해외에 나가면 시청이나 국회의사당 등 공공기관도 둘러본다"며 "정년까지 공직 생활을 한 노고에 보답하는 성격이 강해 대부분 문화유적지를 찾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예산 감시운동을 펼치는 '함께하는 시민행동'의 최인욱(37) 예산감시국장은 "조직에서 열심히 일한 것에 대해 선물을 줄 수는 있지만 국민의 세금이 지출됐다는 것이 문제"라고 말했다. 정성호 의원은 "예산이 모자란다면서 중앙정부에 손을 벌리는 지자체들이 이런 식으로 세금을 낭비하는 것은 모순"이라며 "본래 취지에 맞게 부동산강좌.사회봉사 등 퇴직 공무원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한다"고 말했다.

민동기.강기헌 기자

◆공로연수제=퇴직을 앞둔 공무원의 사회 적응을 위한 제도. 중앙인사위 공로연수운영 지침에 명시돼 있으며 지자체 공무원도 이를 준용하게 돼 있다. 지침에 따르면 길게는 1년, 짧게는 6개월간 일을 하지 않아도 정상적인 월급이 지급된다. 또 월급 외 연수비 명목으로 교육비.교재비 등도 실비로 지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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