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시평

‘국민경선’ 유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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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세기 초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시대정신이 있다면 그것은 ‘참여’라는 말로 집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참여의 시대정신을 보여주는 현상을 찾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사회 각 분야, 전국 각지의 수많은 각종 시민단체의 결성과 활동이 그 대표적 예이며, 이제 우리 사회에서 거의 일상화된 집회 및 시위도 그런 범주에 속한다. 그리하여 시대정신이라는 맥락에서 보면 현 정부가 ‘참여정부’를 표방하고 나선 것도 우연이 아니었던 것 같다. 사실 현 정부의 집권 자체가 참여에 대한 열망이 시대를 지배하게 된 결과라 할 법하다.

참여가 시대정신이 된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민주화와 시민사회의 발전을 의미하며 그 점에서 고무적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우리 시대를 풍미하는 참여 현상이 꼭 긍정적으로만 받아들일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동안 진행된 주요 정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을 보면 그렇다. 현재 국회 내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한 정당 가운데 단 한 정당을 제외하고는 모두 자당의 대통령 후보를 선출하는 방식으로 소위 ‘국민경선’을 택했다. 정당의 대통령 후보 결정에 일반 국민이 참여해 자신의 의사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국민경선이야말로 참여라는 시대정신의 전형적 사례라 할 수 있다.

시대정신의 전형으로서 국민경선은 언뜻 보기에 정당의 의사결정에 민의를 반영함으로써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한다고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자세히 따져 보면 민주정치의 근간인 정당정치의 발전에 오히려 부정적이라 할 수밖에 없다. 국민경선을 채택한 정당들은 저마다 국민의 정치 참여를 확대하고 촉진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내면에는 당이 스스로 후보를 선정하는 데 대한 자신감의 결여가 작용했다. 그런 측면에서 국민경선이란 대통령 후보의 선출을 사실상 국민의 손에 내맡긴 것이나 진배없다. 당원이 아니라 비당원의 선택이 좌우한 실제 각 정당의 경선 과정이나 결과가 그 점을 증명한다.

이렇듯 국민경선과 더불어 정당정치는 실종됐다. 국민경선을 채택한 정당들은 당의 이념과 정책을 실현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할 인물을 자기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포기했고 이로써 자신들의 존재 이유를 스스로 부인했다. 자기 정체성을 잃어 버리고 자기 존재의 당위성을 확신하지 못하는 정당에 집권 능력을 기대하고 책임정치를 바라기는 어렵다.

각 정당의 국민경선에는 국민선거인단 투표, 휴대전화 투표, 여론조사 등 여러 가지 새롭고 복잡한 방식이 동원됐다. 이 모두가 가급적 광범위하게 민의를 반영하는 수단으로 정당화됐다. 그러나 민의가 무엇인가? 민의·민심·여론 등은 민주정치와 관련해 강한 호소력과 규범성을 지니지만 동시에 추상적 차원을 벗어나면 실체가 모호하다. 게다가 그것은 경우에 따라 조작이 가능하고 즉흥적이며 변덕스럽고 무책임하기도 하다.

그러나 국민경선을 선택한 정당들이 민의 수렴에만 목표를 두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대통령 후보를 선출하는 당의 행사에 국민의 관심을 끌어 보자는 게 본래의 속셈이었을 것이다. 만약 국민경선이 정치적 흥행을 위한 전략이었다면 국민참여경선이 아니라 국민동원경선이라고 해야 온당할 것이다.

여하튼 국민경선을 통해 각 당은 정치 흥행에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정치 발전에는 기여하지 못했다. 국민경선은 대중적 인기도가 정치 지도자를 결정하는 대중민주주의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정치 지도자를 선출하는 선거와 인기 연예인을 뽑는 인기투표를 구별하기 힘들게 만들었다.

이뿐만 아니라 그것은 정치가 유흥의 대상으로 전락한 한국 정치문화의 문제점을 한층 더 악화시킬 위험성마저 안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정치는 비판적 사고와 생산적 논의의 대상이 아니라 권력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구경거리가 된 지 오래다. ‘승부수’ ‘한판 승부’ ‘원샷 경선’ 등의 언어가 한국 언론에 난무하는 현상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상생과 화합이 아니라 갈등과 대립이 지배하는 한국 정치는 드라마보다 더 극적인 요소를 갖추고 있고, 정치를 바라보는 국민은 그로부터 흥미진진한 반전과 역전의 승부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국민경선의 미명 아래 국민이 권력정치의 극적 효과를 제고하는 정치판의 들러리로 전락하지 않는지 진지하게 논의해 봐야 할 것이다. (베를린 자유대학 체류 중)

안병직 서울대 서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