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비서실>盧,권대표에 밀려 고향 출마 좌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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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먼저 權翊鉉의원의 경우는 85년 12대 총선 공천 당시,꼭 4년전 당대표였던 權의원이 盧泰愚 당시 올림픽조직위원장의 희망을 꺾은 적이 있었다.盧위원장은 당시 서울 서대문에서 출마할 것을 권유받았다.그러나 이미 대권꿈을 꾸고 있었던 盧위원장으로서는 야당바람에 휩쓸려 낙선할 가능성이 있는 서울 출마를 꺼렸다. 단순히 낙선이 두려워서라기보다 만약 국회의원선거에서 낙선할 경우 가슴속 깊이 키워온 대권꿈을 포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盧위원장은 보다 안전한 고향에서의 출마를 원했다.그런데 盧위원장의 고향인 대구 동.북구는 權대표의 사람인 金瑢泰의원의 지역구.盧위원장은 결국 전국구의원으로 원내에 진출할수밖에 없었다.이때 盧위원장의 가슴에 뭔가 맺히지 않 을 수 없었을 것이다.12.12의 주역이자 신군부정권의 제2 지배주주임을 자부해 온 盧위원장측에서 12.12와 무관했던 權의원을 볼 때 『무임승차해 가지고 너무 컸다』는 불쾌감이 적지 않았을것이란 풀이다.權대표는 대령시절 尹必鏞사 건으로 예편해 5共정권의 탄생을 가능하게 했던 12.12에 전혀 참여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당시 權의원은 집권당의 대표였고,盧위원장은 전국구 초선의원에 불과했다.
權正達의원 역시 같은 시기에 盧대통령에게 불쾌한 기억을 남겼다.당시 지역구를 잡지 못한 盧위원장은 전국구후보로 내정돼 지역구 선거운동 지원차 지역을 돌고 있었다.순회중 盧위원장이 權의원의 지역구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였다.
盧위원장의 도착사실을 듣고도 權의원이 자기방에서 나와보지도 않았다.사무총장을 지낸 5共 정치거물로서 전국구 초선으로 내정된 정치 초년병의 방문에 별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權의원은 육사15기로 盧위원장의 4년 후배 라는 특별한인간관계가 있었기에 이같은 처신은 盧위원장으로서는 참기 어려웠을 것이라는게 주변의 공통된 지적이다.
얼마간 기다린 뒤 盧위원장은 權의원의 방으로 안내됐지만 權의원은 상석을 차지한채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간단히 인사만나눈뒤 옆에 앉은 盧위원장은 안중에도 없다는듯 다른 사람과 얘기를 계속했다.
속을 내비치지 않는 盧위원장이지만 그를 오랫동안 수행해온 李丙琪보좌역(6共 후반 청와대 의전수석)은 그의 얼굴이 조금씩 흙빛으로 변해가는 것을 알아챘다.李보좌역이 『가시죠』라고 한마디 귓속말을 하자 盧위원장은 기다렸다는듯 두말 않 고 그대로 일어나 나와버렸다.
나중에 盧위원장이 당대표가 된 뒤 權의원은 몇차례 육사 선후배모임에서 盧대표에게 당시 일에 대해 사과했으나 이미 盧대표의머리속에 각인된 오점을 지울수는 없었다.이런 일들은 모두 우발적인 단일사건이 아니라 5共 초반기 실세들의 盧 泰愚 푸대접이라는 당시 여권내의 일반적 경향이라 할 수 있었다.당연히 5共초반 상대적으로 힘을 많이 가졌던 兩權씨는 5共 후반으로 넘어가면서 그들의 힘을 앗아간 盧대표와 껄끄러운 관계가 될 수밖에없었던 것이다.
또다른 희생자 金相球의원에 대해서는 「친인척」이라는 한마디에이견을 다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6共의 친인척인 金復東.琴震鎬씨등도 본인들의 희망에도 불구하고 공천을 줄 수 없었던 분위기였기에 6共이 배척하고자 했던 5共의 친인척인 金의원의 공천탈락은 당연시됐다.
그러면 반대로 李鍾贊.裵命國의원은 어떻게 저승길 문앞에서 되돌아 나올 수 있었을까.
〈吳炳祥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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