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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7면

안정효의 베스트셀러 소설『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를 읽기 시작한 독자들중 꽤 많은 사람들이 수없이 쏟아지는 인용과 작가의 장광설에 질려버렸다.그러나 정지영 감독의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그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감독은 영화라는 감성매체,한계 상영시간 2시간이라는 그릇의 특성,그리고 최민수와 독고영재 같은 대중스타의 위력까지 잘 알고 있고 더욱 결정적으로 이 불타는 여름 대중관객들이 보일 한심한 인내력에 대해 상당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결과『헐키』로 불리는 이 영화는 흥미와 감동이 효과적인드라마의 경제학으로 빛나는 작품이 되었다.30대 신인감독들의 영화가 기대보다 실망으로 바뀌고 있는 요즘 정지영은 한국영화계의 맏형 역할을 다시 한번 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안정효의 끝없이 이어지는 만연체 문장을 정복한 독자라면 영화가 꽤나 불만스러울 것이다.왜냐하면 사실 원작의 무게중심은 한 영화광의 드라마틱한 파멸의 이야기보다 작가가 속한 4.19세대의 한국 현대문화사에 대한 애정어린 비망 록에 실려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는 원작의 원대한 야망과 지성적 접근을 흉내내지 않고 철저하게 문제아 임병석과 관찰자 윤명길이라는 인물 설정,1950년대 말부터 80년대 초반에 이르는 한국 현대사의 영화적 재현,그리고 할리우드 영화의 파괴적인 환각의 힘이라는 주제를 영상화하는데 전력을 다하고 있다.
영화가 시작되면 관객은 곧 지금은 잊혀져 마치 왕조시대처럼 아득한 산업화 이전의 한국과 조우하게 된다.거기서「황야의 칠인」으로 대표되는 영화광들의 꿈이 즐겁고 낭만적으로 펼쳐진다.이영화를 통한 성장이야기가 영화의 전반부를 이룬다 .그러나 『헐키』는 변경의 지대에서 할리우드 영화를 짝사랑한,그래서 엄청난러브레터를 보냈지만 답장 한번 못받아 본 한국인의 기록이다.절대로 이탈리아 영화『시네마 천국』과 같은 시정 넘치는 노스탤지어의 기록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에는 가파르고 골 깊은 단절의 골짜기가 존재한다.그것은 즐거운 할리우드 영화를 따뜻한 시선만으로는 볼 수없는 한국인의 고뇌와 모순의 골짜기다.세계관과 스타일의 혼란으로 규정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우리시대의 자화상이기도 하다.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제 몫을 다하고 있다.
그래서 가치있는 영화가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다.
강한섭〈영화평론가.서울藝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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