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근 정치가 아베 몰락 불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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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도적인 지지율을 등에 업고 출범한 일본의 아베 정권이 불과 1년 만에 무너졌다. 여론의 지지율이란 모래성인가. 잠시 지나면 잦아드는 바람인가. 자민당의 유일한 대안이라고 추앙받던 젊은 총리 아베 신조는 초라한 뒷모습을 남기고 무대에서 내려오고 말았다. NHK 정치부 기자 출신으로 국회의원 비서관을 거치면서 현실정치를 몸으로 경험한 일본의 프리랜스 저널리스트 우에스기 다카시는 아베 정권의 몰락 원인을 측근 정치의 파탄에서 찾는다. 우에스기는 아베 정권의 붕괴를 예견이라도 하듯 아베의 총리 사퇴 직전 『관저붕괴』라는 책을 내놓아 일본 정계에 충격을 안겨줬다. 그의 책은 발간 한 달 만에 6만 부를 돌파하는 베스트셀러가 됐다. 그의 책은 권력의 몰락이 권력자 측근의 자그마한 부주의와 실수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경고하고 있다. 우에스기가 분석한 아베 정권의 몰락 과정을 정리했다.

아베는 정치에 관한 한 영재교육을 받고 자랐다.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의 딸이자 아베의 모친인 요코는 남편(아베 신타로 전 외무상)이 못 이룬 총리의 꿈을 아들에게서 이뤄보려고 주도면밀한 준비를 했다. 아들이 자민당 총재에 출마할 때를 대비해 언제든지 쓸 수 있는 자금을 쌓아뒀다. 자택의 금고가 꽉 차 다 넣지 못한 현금 다발이 보자기에 싸인 채 다다미 위에 굴러다닐 정도였다. 그 덕에 아베는 정치자금으로 어려움을 겪어본 적이 없다.

조직력도 탄탄했다. 아베는 자민당 총재 선거 이전부터 다방면의 지지세력을 확보했다. 같은 파벌의 의원들로 구성된 원내 지지파, 측근에서 보필해주는 가신 그룹, 그리고 여론의 지지를 유도하는 원외 지원세력들을 총동원했다. 정규군, 친위대, 게릴라 부대를 골고루 사용한 것이다.

이처럼 잘 갖춰진 집권 인프라에도 불구하고 아베 정권은 출범 초부터 불안해 보였다. 무엇보다 논공행상 인사가 두고두고 화근이 됐다. 문제 있는 인물을 검증도 없이 주요 포스트에 앉혔다 나중에 쓸데없는 매를 벌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혼마 마사아키 세제조사회장이다. 평소 행정개혁을 주장하던 그는 관사에서 호스티스 출신의 애인과 동거해온 사실이 드러나 사임했다. 혼마는 아베 측근의 추천으로 기용된 인물이다. 경찰정보망을 동원했다면 간단히 걸러졌을 인물인데도 아무 검증 없이 발탁돼 아베 정권에 큰 상처를 주고 말았다. 아베의 측근이 얼마나 느슨하게 일을 처리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각료들도 문제였다. 아베 정권 1년간 각료 3명이 이런저런 스캔들과 망언 사건으로 물러났다. 그중 마쓰오카 도시카쓰 농림수산상은 정치자금 문제가 불거지자 재임 중 자살하고 말았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럴 때마다 아베와 그의 측근들은 “별거 아니다”며 미적지근하게 대응했다는 점이다. 그러다 문제는 일파만파로 커지곤 했다. 위기관리 또는 대미지 컨트롤 (Damage Control)에 소홀했던 것이다.

물론 측근을 중용하는 것은 정계에서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는 법이다. 아베의 경우 이 선을 넘었다. 마토바 준조 사무담당 관방부장관이 전형적인 사례다. 사무담당 관방부장관은 전통적으로 엘리트 사무차관이 임명되는 게 관례다. 오래전 대장성 국장급으로 퇴임한 마토바를 일거에 관방부장관으로 앉히자 관료사회는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정권 출범 초부터 관료들의 조직적인 사보타주(태업)가 시작됐다. 주요 정보는 관방부장관에게 아예 올라오지 않았다. 그 결과 총리 보좌 기능은 대단히 취약해졌다. 초장부터 관료 장악에 실패한 것이다.

시오자키 야스히사 관방장관의 기용도 잘못된 인사다. 그는 유능한 정책통이긴 하다.
하지만 동물적인 정치감각과 주도면밀한 조정능력이 필요한 관방장관에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그의 기용을 두고 자민당 중진들도 조마조마하게 생각했다.

게다가 가신 그룹 내부에서 총애 경쟁이 벌어지는 바람에 보좌 기능이 마비됐다. 특히 삼위일체를 이뤄 총리를 보좌해야 할 이노우에 요시유키 수석비서관, 세코 히로시게 홍보담당 보좌관, 시오자키 관방장관이 중요 정보를 서로 감춘 채 따로 놀았다. 그중에서도 이노우에가 가장 문제였다. 아베가 개인적으로 가장 신뢰하던 이노우에는 충성심으로 똘똘 뭉친 인물이다. 아베에 대한 비판을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일 정도였다. 문제는 비서관으로서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는 총리 관저에 내빈이 찾아올 때 비서인 주제에 총리 옆자리를 차고 앉는가 하면, 다른 보좌관들이 아베에게 다가가는 것을 견제하기도 했다. 정서적인 충성심이 앞서다 보니 냉철하고 이성적인 계산을 하지 못한 것이다.

세코 보좌관과 시오자키 관방장관도 긴밀한 협조체제를 구축하지 못한 채 우왕좌왕했다. 또 아베 친위대장으로 불리던 시모무라 하쿠분 정무담당 관방부장관은 종군위안부와 관련해 망언을 하는 바람에 아베 정권의 외교정책에 큰 부담을 줬다. 한마디로 측근정치의 파탄이 도처에서 일어난 것이다.

아베 본인의 우유부단도 자멸을 불렀다. 결단을 내려야 할 때 모호한 입장을 취하며 책임을 피하려 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의 우정개혁에 반발해 자민당을 탈당했던 의원들의 복당을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이 일어났을 때, 그리고 측근의 스캔들과 각료들의 망언이 정치 쟁점화했을 때 아베는 결단을 피했다. 이 때문에 당내의 지지는 물론 내각 지지율도 많이 까먹었다.

여러모로 아베는 고이즈미에 비해 카리스마가 약했다. 주위를 긴장시키는 위엄도 모자랐다. 고이즈미 정권 때는 회의장에서 총리가 착석할 때까지 모든 각료가 기립했지만 아베 정권에선 총리 앞에서 각료끼리 앉은 채 사담을 나누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또 총리 관저 출입기자와 기념촬영을 할 때 한 기자가 친한 척하며 아베 총리의 어깨에 팔을 두르기도 했다. 고이즈미라면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이처럼 아베 총리 주변은 온통 느슨하고 긴장감이 빠져 있었다. 심지어 아베가 총리 관저에서 당번 비서를 휴대전화로 호출했는데 응답을 하지 않은 적도 있다. 긴급사태였다면 국가위기로 직결될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일이었지만 그냥 넘어갔다.

아베의 편향적인 언론관도 지지율 하락을 부추겼다. 아베는 산케이신문·후지TV와 같은 보수 언론을 감싸고 돌면서 진보 성향의 아사히신문은 철저히 적대시했다. 아사히엔 본때를 보여주겠다고도 했다. 출입기자들은 산케이와 후지TV를 아베의 ‘특무기관’이라고 조소했다. 비서관들은 특정 언론에만 정보를 흘려줬다. 그러니 대다수 언론이 아베에게 우호적일 수가 없었다.

그 결과는 어땠는가. 정치의 총지휘자인 아베는 연주를 계속하려 했으나 관객석은 텅 비고 말았다. 무대에서 내려올 때가 너무나 빨리 닥친 것이다.

남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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