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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정관 풀면 健保 혜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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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마음놓고 애를 낳으세요. 노무현이 키워드리겠습니다."

盧대통령은 2002년 대선 때 이렇게 약속했다. 공약(空約)인 줄 알았더니 웬걸. 정부가 최근 출산 장려 대책을 속속 내놓고 있다. 출산 축하금.아동수당 신설, 출산 전후 휴가 급여 및 보유재정 지원 확대 등-. 코미디 같은 묘안도 들어 있다. 정관(난관) 복원 수술을 하는 사람에게 건강보험을 적용하는 방안이 대표적인 예다. 아이를 그만 낳기 위해 묶었던 정관을 풀어 이을 경우 환자의 부담을 크게 줄이겠다는 것이다. 대신 묶으면 보험을 적용하지 않겠단다.

왠지 정부가 너무 서두르는 모습이다. 출산 감소가 화급한 문제이긴 하다. 세계 최저 수준인 출산율을 이대로 두면 생산가능 인구가 줄어 경제성장률이 둔화하고 노인에 대한 사회적 부양 부담이 커진다. 출산과 양육을 개별 가정이 모두 책임지는 현실에서 사회가 공동 부담하겠다는 인식의 전환도 절실하다.

하지만 대책에도 순서와 단계가 있을 텐데 단박에 모든 걸 돈으로 해결하려 든다. 선거용이라는 의혹도 일고 있다. 저(低)출산의 원인이 온통 돈 때문이라는 위기감마저 조성하고 있다. 문제의 핵심을 비켜가고 있다는 얘기다.

그럼 왜 여성들은 '출산 파업'을 강행하는가. 자아실현이나 부부끼리 잘 살자는 신세대적 삶의 영향이 클 것이다. 하지만 정말 절박한 이유는 아이 키우기가 겁나기 때문이다. 취업 여성의 경우 출산 전후 휴가나 육아휴직을 맘대로 이용할 수 없다. 여성 두명 중 한명은 출산한 뒤 직장을 그만둔다.

육아시설만 해도 그렇다. 아이를 믿고 맡길 만한 보육시설이 그리 많지 않다. 맡길 필요가 있는 아동의 60%가량만이 보육시설을 이용한다. 그나마 괜찮은 보육시설엔 정원의 몇배가 되는 대기자가 2~3년씩 줄을 선다.

학교 교육은 어떤가. 엄마가 챙겨야 할 일이 너무 많다. 지난해 3월 서울 Y초등학교(사립) 1학년 학부모 회의 때 있었던 일이다. 학급 대표 엄마를 맡으려는 사람이 너무 많자 담임교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둘째 아이가 있으신 분은 아무래도 전념하기 힘드니까 되도록이면 외동아이를 키우시는 분으로 했으면 하는데요." 직장이 있는 엄마도 찬밥 신세였다.

수험생을 둔 엄마는 등골이 휜다. 아예 '로드 매니저' 또는 '입시 컨설턴트'로 나서야 한다. "공부는 아이가 하는 것이지 엄마가 신경 쓴다고 잘되나"하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전업주부 어머니를 둔 학생이 맞벌이 가정보다 서울대에 네배가량 많이 들어간다는 연구 결과도 나오지 않았는가. 이러니 애를 잘 기를 수 있는 부유층마저 출산을 꺼린다. 자영업을 하는 崔모(35.서울 천호동)씨. 월 가계 수입이 1천만원가량인 그는 둘째 아이를 가질 엄두를 못 낸다. 첫째 아이(10)는 친정 어머니가 키웠지만 둘째는 키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그에게 출산 축하금이나 아동수당을 몇푼 주고 애를 낳으라고 하면 실정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얘기다. 설사 저소득층 위주로 보육비를 지원한다 해도 언 발에 오줌 누는 격이다.

보육.교육 여건 개선 등 종합적으로 접근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보육의 질을 높이고 사교육비가 많이 안 들도록 교육 시스템을 확 뜯어고치는 일이 최선의 '저출산 대책'이다. 특히 보육정책을 단지 아동.여성뿐 아니라 인구.노동 정책 등과 연계하는 패러다임의 전환이 시급하다.

대부분의 부모는 정부가 아이를 키워 주길 바라지 않는다. 제대로 키울 여건만 조성해 주길 원할 뿐이다.

어렵고 급할수록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

박의준 정책기획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