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뇌 속을 손금 보듯 … 68. 해외 출장 제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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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 교포가 세운 미국 카메롯사의 대표<左>가 1986년 초전도 MRI 기술을 이전받기로 하고 필자(<右>에서 둘째)에게 연구비를 전달하고 있다. [KIST 이순재 영상담당 제공]

“교수들이 학기 중에 오랫동안 학교를 비우고 외국에 나가 있으면 되겠습니까. 한 학기에 15일 이상은 외국에 나가지 못하도록 합시다.”

1985년께다. 생물공학과가 중심이 돼서 교수들의 해외 출장을 통제하기로 했다. 당시 생물공학과에 나처럼 미국 대학에 교수직을 갖고 있으면서 KAIST를 오가던 유두영 교수가 있었다. 그는 UC데이비스 교수를 겸직하고 있었다. 당시 국제 학술지에 가장 논문을 많이 쓰던 교수는 나와 유두영 교수, 타계한 전무식 교수 등이었다. 생물공학과에서 잘 나가는 유 교수가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그를 겨냥해 한 학기에 15일 이상, 1년에 30일 이상 해외 출장을 갈 수 없도록 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교수 자리를 내놔야 한다고 학교에서 법으로 묶어 놓았다.

유 교수도 나처럼 미국을 오가며 연구하랴 수업하랴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같은 학과 교수들이 뜻을 모아 그런 규정을 만들어 발을 묶은 것이다. 결국 유 교수는 미국으로 돌아가버렸다.

생물공학과에서 시작된 해외 출장 제한 조치는 내가 소속된 전기전자공학과로 튀었다. 그러나 나는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95년까지 버텼다. 내가 그렇게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전무식 교수 외 여러분이 밀어주었던 덕분이었다. 또 금성사가 초전도 MRI 기술을 나한테 가져가면서 나를 위한 석좌기금으로 3억원을 KAIST에 내 놓은 것도 큰 힘이 됐다.(이것이 한국에서의 석좌기금의 효시가 됐다). 전무식 교수는 육각수를 연구했으며, 타계하기 전까지 국제 학술지에 300여편의 논문을 발표할 정도로 왕성한 연구활동을 했었다. 그는 누가 내 험담을 하면 “조 교수만큼 KAIST 발전에 기여한 사람 있으면 나오라고 하시오”라며 입을 막았다. 그는 나의 큰 원군이었다. 그는 나의 친형과 같은 보호자였다. 나 또한 전 교수가 타계할 때까지 아주 가깝게 지냈다. 그와 함께 한림원을 창립하는 등 활동도 많이 했다. 문득 그의 다정다감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전 교수가 그렇게 비호해줘도 15일의 출장 제한은 나를 불편하게 했다. 이때부터 주말을 이용해 뉴욕의 컬럼비아대학에 갔다가 월요일 학교로 출근하는 고난의 여행을 수없이 하기도 했다. 김포공항에서 뉴욕까지는 비행기 타는 시간만 15시간 정도 걸릴 때다. 그걸 참고 미국을 왔다갔다 한 것이다. KAIST의 내 연구실은 국제적인 논문이 쏟아져 나오는 보고였기 때문에 도저히 문을 닫을 수 가 없었다.

내가 그렇게 출장을 다니니까 어떤 KAIST 원장은 내 뒷조사까지 시킨 적이 있다는 소문도 있었다. 정말 내가 3일 만에 미국을 갔다오는 것인지 출입국 관리 기록까지 뒤졌다는 것이다. 그렇게 출장 제한 조치를 해놓으면 그만 둘 만도 한데 내가 끝까지 버티면서 더욱 더 왕성한 연구 활동을 하니까 그랬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내가 85년 컬럼비아대학 교수를 접고, 서부에 있는 캘리포니아에 있는 캘리포니아대학으로 다시 옮기는 이유 중의 하나가 됐다. 캘리포니아대학은 한국에서 가기가 컬럼비아대학보다 훨씬 가까웠기 때문이다.

조장희<가천의과학대 뇌과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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