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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볕 따라가다 길 잃지 마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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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진국
김진국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산을 오를 때 뒤에서 따라가는 건 힘들다. 앞에서는 힘에 부치면 천천히 걸을 수 있고, 보폭을 좁힐 수도 있다. 뒤에서 따라가면 마음대로 조절할 수가 없다. 앞사람이 천천히 올라가면 뒤뚱거리며 리듬을 잃어버릴 수 있고, 급경사에서 끙끙대다 앞사람이 휑하니 가버려 허둥지둥 따라가야 할 때도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평양 방문을 보면 꼭 그런 초보 등산객 같다. 그는 임기의 귀퉁이를 아슬아슬하게 밟고 서 있다. 그런 불안한 자세로 김대중 전 대통령의 공적과 같은 무게를 떠안아 보겠다고 팔을 벌리고 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따지자면 노 대통령이 김 전 대통령만 못한 게 없다. 차량 퍼레이드를 벌이며 평양 시민의 환영을 받았고, 북한군 사열도 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포도주로 건배하고, 김 전 대통령이 보지 못한 ‘아리랑’ 공연까지 보고 왔다. 그런데도 국민의 박수 소리는 인색하다. 지지도가 올랐지만 대선판을 뒤집기에는 역부족이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는 창의성과 모험이 주는 감동이 없어서가 아니다. 흉내 내기에 허겁지겁하는 서두름 때문이다. 이번 합의는 ‘~하기로’의 연속이다. 정해진 건 없이 그동안 거론된 문제를 모조리 열거했다. 밥상은 어지러운데 젓가락 갈 곳은 없다. 국민적 공감대도 없이 교환방문의 약속만 깨뜨렸다.

3자 혹은 4자가 모여 ‘종전(終戰)선언’을 하겠다지만 핵 문제 해결 없이 미국이 받을 리 없다. 핵 문제만 떼어놓고 보면 6자회담 합의에도 못 미친다. 그래도 전전긍긍하며 매달리는 건 믿음이 없거나 치적을 뽐내기 위해서다.

가장 많은 부분이 경협이지만 무엇을 위한 것인지도 불분명하다. 김대중 정부에는 그래도 무엇을 하겠다는 철학이 있었다. 국민에게 설명하고, 김정일 위원장을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이 정부는 방향을 잃어버린 것 같다.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이 ‘개혁·개방’이다.

김정일 위원장은 남쪽이 경협을 “너무 정치적으로 이용한다”고 불만을 표시했다. 북한 체제를 무너뜨리려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다. 그의 불안이야 이해 못할 바 아니다. 하지만 그걸 설득해야 할 남쪽 정부가 앞장서 개혁·개방을 금기어로 만든 건 코미디다. 이제까지 추진해온 대북 정책을 송두리째 뒤집어엎어 버린 꼴이 아닌가. 경협을 하다 보면 북한이 시장경제를 배워 개혁·개방할 것이라는 게 햇볕정책의 핵심이다. 그렇다고 김대중 정부가 북한 정권의 붕괴를 바라지는 않았다. 개혁·개방은 북한이 살아남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김정일 위원장은 또 “(개성공단에)하이테크 산업은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고 불평했다. 장사가 된다면 왜 가지 않을까. 남쪽 기업뿐 아니라 미국·일본의 기업도 달려들 게 뻔하다. 핵 문제로, 미사일 문제로 미국과 국제사회가 무역 제재를 하고 있어 가고 싶어도 못 간다. 김 위원장의 푸념은 순서가 뒤바뀐 욕심일 뿐이다.

김대중 정부 시절 북한에 담배 기술을 이전해 주기로 했었다. KT&G를 통해 공장도 지어 주고, 기술자를 보내 엽연초 처리 기술을 가르치려 했다. 하지만 북한 당국은 기술자가 평양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다. 결국 고려호텔에 앉아 기술지도를 할 수밖에 없었다. 담배 잎 찌는 법을 아무리 가르쳐도 태워서 가져왔다고 한다. 기술을 받고, 살아남으려면 개방이 불가피하다.

물론 남쪽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 시장경제가 아니라 관치경제를 가르쳤다. 노 대통령은 안변과 남포에 조선협력단지를 만들기로 약속했다. 정부가 기업의 투자까지 결정한다. 그럴 만한 이유도 있다. 북한에 투자하는 것은 못해도 본전이다. 북한이 계약을 파기하거나 천재지변으로 투자손실이 발생해도 남북협력기금으로 대부분 보전해 준다. 개성공단은 90%를 메워 준다. 그 손실보조 약정액이 7월까지 737억원에 이르고, 연말에는 1000억원에 이른다고 한다. 결국 국민 세금이다.

북한에 시장경제를 가르치려던 초심은 사라지고 맹목적인 대북지원이 돼버렸다. 낚시하는 법을 가르치려다 성급한 마음에 물고기만 퍼주고 있다. 그런 경제가 살아남을까. 그래서 무엇을 하려는 걸까. 앞사람의 뒤통수를 놓치고, 깊은 산중에서 길을 잃어버린 건 아닌가.

김진국 국제담당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