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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문명 통렬히 비판 … 냉철한 페미니스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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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11일 오후(현지시간) 레싱이 영국 런던 햄스테드의 자택 앞에서 축하 꽃다발을 받고 있다. [런던AP=연합]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도리스 레싱(Doris Lessing·88)은 1950년대 ‘앵그리 영 맨(Angry Young Man)’ 세대를 대표하는 작가다.

  그렇다고 그를 반세기 전 작가로 치부하는 건 곤란하다. 그는 20세기를 대표하는 페미니스트 작가며, 20세기 서구 문명의 온갖 모순을 자신의 작품 속에 모두 녹여낸 작가다. 무엇보다 그는 ‘젊은 작가’다. 올해 그는 미수(米壽)의 나이에도 소설 『The Cleft』를 발표했고, 인터넷 사이트 마이스페이스에서 홈페이지(www.myspace.com/dorislessing)를 직접 운영하고 있다. 즐겨 찾는 블로그도 136개나 된다.

 스웨덴 한림원이 그의 이름을 호명할 때 그는 쇼핑 중이었다. AP통신에 따르면, 발표 두 시간쯤 지난 뒤에야 수상 소식을 들은 그는 런던 자택 앞에서 “그동안 나는 유럽의 중요한 상은 모두 받았는데 오직 하나만 빠졌다”며 “이제 모두 채워서 기쁘다. 이번 수상은 로열 플러시(포커에서 최고의 패)”라고 말했다. 레싱은 88번째 생일(10월 22일)을 열흘 남짓 앞두고 생애 최고의 생일선물을 받은 셈이다.

  레싱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권혁경(관광영어과) 안산1대학 교수는 “영국에서 레싱은 버지니아 울프의 맥을 잇는 작가”라며 “이제야 노벨상을 받은 것이 신기할 정도”라고 소개했다.

 ◆힘들었던 어린 시절=레싱은 1919년 이란의 커만샤에서 태어났다. 24년, 다섯 살 나이로 가족을 따라 아프리카 로디지아(지금의 짐바브웨)의 농장으로 이주했다. 정부 지원금과 융자를 받은 이주였기 때문에 그의 가족은 진흙으로 손수 집을 지어야 했을 정도로 힘들게 살았다. 열세 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독학으로 공부했고, 열다섯 살엔 집을 떠나 타이피스트, 전화 교환원 등으로 일했다.

  38년 공무원과 결혼해 두 자녀를 낳고 이혼한 레싱은 재혼했다가 다시 이혼한다. 레싱은 둘째 남편의 성(姓)이다. 49년 재혼에서 얻은 아들만 데리고 소설가를 꿈꾸며 영국 런던으로 향한다. 그때 그의 수중엔 단돈 20파운드가 전부였다. 이듬해 그는 자전적 소설 『풀잎은 노래한다 (The Grass is Singing)』를 발표해 런던에서 큰 반향을 끌어낸다.

  전북대 왕철(영문학) 교수는 “레싱은 영국인이지만 제3세계 작가라 할 수도 있을 만큼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나 백인의 이중성을 다룬 작품이 많다”고 설명했다.

 ◆다양한 작품세계=레싱의 대표작이라면 『황금 노트북 (The Golden Notebook·1962) 』이다. 세계 페미니즘 운동에 본격적으로 불을 지른 소설로 평가되는 작품이다. 한 여류작가가 예술을 통해 자신의 인생을 터득하는 과정을 담은 소설로 모두 5부로 구성됐다. 작가는 서문에서 “이 소설은 내게 여전히 가장 교훈적인 경험으로 남아 있다”고 적었다.

  이 소설은 2002년 세계 100대 작품에 선정됐다. 노르웨이의 노벨연구소와 북 클럽스가 세계 50여 개국 출신 유명 작가 100명에게 설문조사한 결과다. 설문에 참가한 작가는 살만 루슈디(이란), 노먼 메일러(미국), 밀란 쿤데라(체코), 카를로스 푸엔테스(멕시코) 등 당대의 거장이다. 2005년엔 미 시사주간지 ‘타임’에 의해 ‘세계 100대 작’으로 선정됐고, 90년대 중반 중국에선 재판 8만 권이 하루 만에 매진되기도 했다.

  그러나 레싱의 페미니즘은 기존의 페미니즘 운동과 달랐다. 여기엔 사연이 있다. 영국에 거주하던 레싱이 짐바브웨를 방문했을 때 그곳에서 그는 미국인 페미니스트들을 보고 크게 실망한다. 한 달에 고작 70∼80달러로 연명해야 하는 아프리카의 현실은 무시하고 그들은 서양식 교육방법 따위나 가르치고 있었다. 레싱은 그건 “문화제국주의에 불과하다”고 판단했다. 이어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백인이나 중산층 여성들의 삶은 크게 변한 것이 사실이지만 진정 변해야 할 소외계층의 삶은 예전과 다름없다.”-자서전 『나의 속마음』(원제 Under My Skin, 1994)

  레싱의 작품세계를 분석한 논문집 『도리스 레싱: 20세기 여성의 초상』의 저자 민경숙(영어과) 용인대 교수는 “레싱은 철저하게 실험적인 삶을 산 사람”이라며 “리얼리즘 소설부터 미래공상과학소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식을 시도하는 실험작가였으며, 자신의 명성 때문에 작품이 과대 평가받는 것을 우려해 가명으로 소설을 쓰기도 했다”고 레싱을 소개했다.

  레싱은 『황금 노트북』에서 이렇게 말했다. “개인의 발전은 인류의 생존을 위한 단 하나의 희망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레싱은 다시 한번 발전의 길을 걷게 됐다.  

손민호 기자

☞◆앵그리 영 맨(Angry Young Man)=‘성난 젊은이’란 뜻으로 1950년대 영국 전후세대 작가군을 뜻한다. 56년 영국 로열코트 극장에서 상연된 J J 오스번 원작의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가 당시 런던 젊은이로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끌면서 널리 알려졌다. 영국 사회의 권위를 비판하는 작품세계가 주를 이룬다.

레싱의 대표적 작품들

◆황금노트북(The Golden Notebook)

도리스 레싱의 자전적 요소가 강한 소설이다. ‘자유로운 여자들’이라는 테두리 소설과 주인공이 쓰는 4권의 일기가 교대로 전개되며, ‘소설 속에서 소설 쓰기’라는 메타픽션적 구성을 취한다. 주인공인 여성작가 안나는 자신의 여러 역할(사회주의자·이혼녀·어머니·연인…)사이에서 갈등을 겪다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1997년 평민사에서 출간한 한국어판은 현재 절판상태. 출판사 뿔에서 새로 번역, 10월 중 출간할 계획이다.

 ◆다섯째 아이(The Fifth Child)

 아주 정상적인 두 남녀가 만나 전통적 의미의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 간다. 하지만 그들의 ‘다섯째 아이’로 이상한 유전자의 지배를 받고 있는 비정상적인 아이가 태어난다. 그 아이가 ‘이상적인’ 가정을 파괴해가는 과정을 간결하고 긴박한 문체로 그리면서 레싱은 전통적인 가치관이 하나의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1999년 민음사 출간.

 ◆런던스케치(London Observed: Stories & Sketches)

 런던의 구석구석을 배경으로 그린 열 여덟 편의 단편집. 좁은 도로에서 마주 선 채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는 두 대의 자동차와 그 때문에 오도 가도 못하는 다른 자동차들을 그린 ‘원칙’등을 비롯해 현대 도시인의 자화상이 담겨있다. 2003년 민음사 출간.
 

이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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