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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슈트키드의낮과밤>14.모일곳과 쉴곳(下)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8면

92년 8월15일 광복절.뉴질랜드 오클랜드의 번화가 빅토리아街에 태극기를 내건 「손바닥만한」사무실이 문을 열었다.
지금은 뉴질랜드 교민이 된 C모씨(당시 25세)가 서울에서 H大공대를 졸업하고 서울발 오클랜드행 편도 항공권 한장과 2백달러를 들고 뉴질랜드에 건너온지 다섯달만에 낸 첫 사업체(?)였다. 비록 영어는 서툴렀지만 일본어와 컴퓨터를 다룰줄 알았던탓에 비교적 쉽게 여행사에 일자리를 마련한 C씨는 사무실을 내기 위해 다섯달치 월급을 톡톡 털었고 대한무역진흥공사(KOTRA)뉴질랜드 지사로부터는 태극기를,교민들로부터는 의자 등 집기일부를 기증받았다.
이름하여 「샘터한인학교」.
유학생들에겐 영어.일어를,교민 자녀와 현지인에겐 한글을 가르치겠다는 포부로 시작한 일종의 야학형태 무료봉사기관이었다.
『교민사회 역사가 짧은 뉴질랜드에 의외로 조기 유학생이 많았어요.당시만해도 조기 유학생 상당수는 한국이나 호주에서 「문제」가 있어 쫓기듯 뉴질랜드에 건너온 학생들이었죠.교민들로부터는「교민사회 물을 흐린다」고,대사관으로부터는 「조 기 유학은 편법」이라고 따돌림 받는 천덕꾸러기들이었죠.』 C씨와 뜻을 같이한 12명의 유학생들은 매월 20쪽짜리 교지를 발간하면서 교민에게는 생활정보를,유학생에게는 진학정보를 알렸고 7~8명의 교민들과 단체들이 호응,50~3백달러(뉴질랜드 1달러는 약 4백50원:이하 뉴질랜드달러)씩 기 부금도 건네줬다.
가르치는 과목도 점차 늘어나 국어.영어.일어.수학 과목은 난이도별로 등급을 나누었고 컴퓨터 과목이 추가됐다.교양강좌로는 자동차정비상식과 사진학을 강의했고 테니스등 동호회도 결성됐다.
물론 무료였다.
그러나 샘터한인학교의 활동범위가 늘어나면서 잡음이 일기 시작했다. 『젊은 애들이 몰려다니며 연애나 한다』는 비판이 들려오면서 기부금은 턱없이 줄어드는데 매월 2천달러(90여만원)의 임대료와 경비는 「없는 집 제사 돌아오 듯」했다.
『학생들을 가르치자니 우선 한글로 된 책이 필요했습니다.돈도없었지만 뉴질랜드에서 구하기도 어려워 우리나라 공공기관과 대형출판사에 협조를 요청했지만….지금 생각하면 순진했지요.아예 아무런 회답조차 없더군요.』 C씨는 회사 몰래 문구류를 가져다 비품으로 쓰기 시작했고 교지에 광고를 싣기도 했지만 젊음과 패기만으로 이국땅에서 유학생들을 모아 야학을 계속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교지 「샘터」에 『누가 그들에게 돌을 던지는가』라는 독자투고를 했던 주부 L씨.
『자신들의 몸과 마음,궁색한 용돈까지 쪼개가면서 노력하는 젊은이들에게 수고한다는 말대신 돌을 던지고 마음에 상처를 주는 어른들도 있었지요.「샘터」를 상업적으로 이용하려 했던 일부와 젊음을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했던 교민사회가 그들 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것같아요.비록 서투르다 하더라도 지켜봐주는 인내심이 필요했는데….』 오클랜드 한인가라오케에서 아르바이트하는 金태훈군(20)의 표현은 좀더 직설적이다.
『중3때 유학을 떠나 호주에서 3년,뉴질랜드에서 1년을 살았어요.조기 유학생들이 이국에서 방황할 때 그들을 욕하고 탓하는소리는 지겹도록 들어봤지만 진심에서 그들의 밥 한끼를 걱정해주고 방황을 바로잡아주려는 사람이 있는줄 아십니까 .』 운영난을견디지 못한 샘터한인학교는 종간호가 돼버린 93년 5월호 겉표지에 이렇게 쓰고 있었다.
『사람들이 아는 것은 가마 타는 즐거움뿐.가마 메는 괴로움은모르고 있네….』 ***교민.현지기업 나서야 이민 역사가 오래된 미국 또한 사정은 엇비슷하다.
LA밸리지역 학부모 회장이자 LA통합교육구 교육자문위원인 金聖愛씨(42.여).
『유학생 단체들이 몇개 있지만 지원받기 힘든게 현실이지요.구심점 없는 유학생들을 위해 대사관.영사관등 정부기관이나 교민.
현지 진출 기업들이 나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총영사관에 교육담당 영사가 1명씩 있지만 관할지역이 워낙 광범위하 기 때문에 모든 유학생들의 편의를 돌보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게다가 대사관.영사관이 할 수 있는 재정적 지원도 한계가 있고요.』 그러나 「모일 곳」을 마련해주기 위해 아무도 나서지 않는동안 책임감과 자율을 배우지 못한채 미지의 세계에 투하된 조기 유학생들의 방황은 해마다 늘어날 수밖에 없다.
〈權寧民기자〉 ……………………………………… 다음회는 「성실과젊음이 재산」(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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