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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열씨 “이주 고려인 도와준 카자흐인에 한방 인술로 보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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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이정열 박사가 우슈토베를 방문해 현지인에게 침을 놓고 있다

앙아시아 카자흐스탄에서 고려인과 현지인들을 상대로 1년 넘게 무료로 한방 시술 봉사를 하는 한의사가 있다. 정부의 해외 파견의사로 지난해 3월부터 카자흐스탄의 옛 수도 알마티에 있는 한-카자흐스탄 친선병원에서 부원장으로 일하고 있는 이정열 박사(46)가 주인공이다.

“70년 동안 쌓인 고려인들의 한(恨)을 무료 시술로 조금이나마 달래줄 수 있었으면 합니다.”

 원광대 한의대를 졸업한 뒤 국내에서 20년가량 한의사로 일하던 이씨는 한국국제협력단(KOICA) 소속으로 2년간 카자흐스탄에 파견됐다. 그는 “환자를 돈으로만 보아온 지금까지의 태도를 반성하는 의미에서 봉사를 자원했다”고 말했다.

 그는 친선병원에서의 진료 외에 알마티에서 420km 떨어진 인구 3만의 소도시 우슈토베를 찾아 별도로 무료 시술을 해오고 있다. 우슈토베는 1937년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에 의해 극동 지역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한 한인들이 처음 정착한 곳이다. 영하 40도까지 내려가는 한겨울의 황무지에 내팽개쳐졌던 이주민들 가운데 상당수가 추위와 배고픔으로 죽어간 땅이기도 하다. ‘고려인’이라 고 불리는 이주 한인의 후손 5000여 명이 이곳에서 살고 있다.

 “파견에 앞서 카자흐스탄에 관한 자료를 챙기다가 고려인이 겪은 수난의 역사를 알게 됐습니다. 침을 잡은 내 손으로 그들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어루만져 주고 싶었습니다.”
 이 박사는 지난해 8월부터 한 달에 한번 꼴로 우슈토베를 찾는다. 지프로 왕복 8시간이 걸리는 만만찮은 거리다. 친선병원에서 함께 일하고 있는 황상연(30) 내과 전문의와 한 팀을 이뤄 간다. 한번 가면 하룻밤을 현지에서 묵으며 이틀 동안 진료한다. 지난달까지 모두 11차례 방문해 2900여 명을 치료했다.

 지난달 13일 그의 진료길에 따라나선 기자에게 이 박사는 “한국 의료진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는 주민들을 생각하면 피곤함이 사라진다“며 웃었다. 이 박사는 만성 통증을 호소하는 환자들에게 침을 놓아주고 필요할 경우 부황과 뜸 시술도 한다.

 그에 대한 현지인들의 신뢰는 절대적이다. 고려인은 물론이고 이슬람교도인 카자흐인과 체첸인, 쿠르드인들도 현지 병원을 찾지 않고 이 박사 일행이 오기를 기다린다. 골반과 다리가 아파 이 박사를 찾은 고려인 할머니 허 예카테리나(71)씨는 “침을 맞고 나서 통증이 훨씬 줄었다”며 이 박사에게 연신 고개를 숙였다. 이들에 대한 진료는 모두 무료로 이뤄진다. 이 박사는 현지인들이 70년 전 강제이주 당한 고려인들에게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하는 도움을 아끼지 않는 데 대한 보은의 뜻이 담겨있다고 설명했다.

 이 박사는 현재 통역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환자들과의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 러시아어 공부에도 열심이다.

우슈토베(카자흐스탄)=유철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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