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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發 물가불안 세계경제 옥죄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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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호 19면

중국 전역으로 확산된 돼지 청이병으로 수십만 마리의 돼지가 폐사하면서 중국에 돼기고기 파동이 일고 있다. 난징(南京) 근처 한 돼지사육장 농부들이 병에 걸린 돼지를 살처분하기 위해 차에 싣고 있다. [난징=로이터/뉴시스]

■중국인들에게 돼지고기는 곧 쌀

中 ‘돼지고기값’의 나비효과

‘장시성 돼지’와 뉴욕 월가의 상관관계를 추적해보자.

장시성 소도시인 장수(樟樹)시에서 양돈업에 종사하고 있는 왕(王)선생. 돼지 약 1만 마리를 기르고 있는 그는 주변에서 꽤 잘 알려진 농장 주인이다. 아무런 탈이 없이 잘 운영돼왔던 왕 선생의 돼지우리에 이상이 감지된 것은 지난해 여름. 몇몇 돼지가 고열증세를 보이는 듯싶더니 피부에 붉은 반점이 피기 시작했다. 그는 ‘감기겠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중 몇 마리가 죽어나가면서 사태가 심각해졌다. 죽은 돼지의 귀는 푸른색으로 변해 있었다. 돼지 청이병(靑耳病·중국어 藍耳病)은 그렇게 처음 중국에 등장했다.

“지난해 여름에만 3000마리가 죽거나 살(殺)처분됐습니다. 당시 장수시 돼지 중 약 60%가 청이병에 걸렸고, 어린 돼지의 경우는 발병률이 80%를 넘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시장에 내다팔 돼지도 없습니다.” 홍콩 봉황TV에 비친 왕 선생의 얼굴에는 주름이 깊게 파여 있다.

지난해 여름 양쯔(揚子)강 유역에서 발생한 청이병은 지금 중국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다. 현재 중국에서 사육되고 있는 돼지는 약 5억 마리. 전 세계 양돈의 절반을 넘는 수준이다. 중국 정부는 이 중 약 17만 마리가 폐사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외부 전문가들은 정부 발표를 믿지 않는다. 최소한 40만 마리는 죽었을 것(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이라는 보도가 있는가 하면, 홍콩 언론에서는 100만 마리가 넘을 수도 있다는 추측이 나돌고 있다.

돼지는 중국인들에게 쌀과 같은 존재다. ‘저량안천하(猪糧安天下·돼지고기와 식량이 천하를 편안하게 한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중국인 1인당 연간 육류 평균소비량은 39.6㎏에 달하고 있고, 이 중 약 70%가 돼지고기다. 이런 돼지고기의 공급이 뚝 떨어졌으니 당연히 값이 오를 수밖에 없다. 지난해 가을 슬금슬금 오르더니 올 초 폭등세로 돌변했다. 현재 중국 돼지고기값은 ㎏당 약 20위안(2400원, 1위안=약 120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85%나 뛰었다. 베이징 차오양(朝陽)구의 톈웨이(田偉)는 “일반 가정 식탁에서 돼지고기가 사라지고 있다”며 “당국은 돼지고기 가격이 조만간 안정을 되찾을 것이라고 선전하지만 누구도 이를 믿지 않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돼지고기 파동’이 일어난 것이다.

■돼지 파동으로 8월 물가 6.5% 뛰어

돼지고기 파동은 물가에 직격탄을 날렸다. 최근 수년간 1%대에 머물던 중국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은 지난해 12월 2%대로 오르더니, 지난 3월에는 정부의 물가인상 억제선인 3%를 돌파했다. 중국 국가통계국이 발표한 지난 8월 CPI 상승률은 6.5%. 중국 소비자물가가 정부의 통제를 벗어나 뜀박질하고 있는 것이다.

올 초까지만 해도 중국 정부는 인플레에 대해 ‘별로 문제 될 게 없다’는 입장이었다. 돼지고기값만 잡으면 물가는 다시 안정세를 찾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중국 CPI 구조를 뜯어보면 납득이 가는 얘기다. CPI 조사대상에서 식품이 차지하는 비중은 34%로 공산품이나 서비스 항목보다 월등히 높고, 그중에서도 육류 비중이 크다. 지난 8월 식품가격 상승률은 18.2%에 달해 평균치(6.5%)의 3배에 육박했다. 식품가격 중에서도 육류값이 49.0%나 올라 가장 높았다. 국가통계국은 CPI 상승의 80.9%가 돼지고기로 인한 것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국가통계국 경제분석가인 야오징위안(姚景源)은 “지난 8월 식품을 제외한 CPI는 약 1% 오르는 데 그쳤다”며 “청이병이 점차 안정되고 있어 약 3개월 후면 물가가 잡힐 것”이라고 자신하고 있다.

■중국 경제, 고물가 구조로 바뀔 조짐

중국 정부의 바람대로 돼지 청이병이 잦아들면 소비자물가지수가 ‘정상궤도’로 되돌아갈 수 있을까? 많은 전문가들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경제가 고물가 구조로 바뀌고 있다는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돼지고기 파동 원인을 중국 경제의 구조적인 모순에서 찾는다. 중국 농민들은 개혁·개방 과정에서 도시민에 비해 혜택을 덜 받아왔다. 정부의 가격통제 정책과 시장개입으로 농산물은 제값을 받지 못해 왔다. 농촌지역 주민들과 도시민의 소득격차는 개혁·개방 초기만 하더라도 1대 1.9에 그쳤으나 지금은 1대 3.2에 달했다는 게 이를 보여준다. 베이징대학 중국경제연구센터의 쑹궈칭(宋國靑) 교수는 “돼지고기는 다른 농산품에 비해 시장화 정도가 높은 품목”이라며 “시장화가 높은 품목을 시작으로 농산물가격은 지속적으로 상승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돼지고기 파동이 진정되는 것과 상관없이 앞으로도 농산물가격은 꾸준히 올라갈 것이라는 주장이다.

물가인상의 근본 이유를 유동성에서 찾아야 한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돼지 청이병이 전반적인 물가상승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데에는 돈이 너무 많이 풀려 있기에 가능했다는 얘기다. 블룸버그의 유명 칼럼니스트인 앤디 무커지는 “무역흑자로 매달 200억 달러가 넘는 달러가 쏟아져 들어오고 있고, 은행자금은 지금 이 시간에도 주식시장·부동산시장 등으로 빠져나가고 있다”며 “혹 돼지고기값이 안정되더라도 임금과 서비스 가격 상승을 막기 어려울 것이며, 그 배후에는 막대한 유동성이 도사리고 있다”고 강조했다.

중국 금융당국은 긴장하는 빛이 역력하다. 중국인민은행(중앙은행)은 지난 15일 올 들어 다섯 번째 금리인상을 단행했다. 증시와 부동산시장에 풀린 돈을 회수하고, 물가를 잡자는 차원이다. 저우샤오촨(周小川) 인민은행장은 기회만 있으면 인플레를 잡겠다고 엄포를 놓고 있다. 돼지고기에서 시작된 인플레가 식료품에 이어 공산품으로 확대될 조짐이 뚜렷하기 때문이다. 특히 가뜩이나 오름세를 타고 있던 임금에 더 큰 상승 압박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중국 칭화(淸華)대학 중국·세계경제연구센터의 리다오쿠이(李稻葵) 교수는 “중국 경제는 그동안 ‘고성장-저임금-저인플레’라는 비정상적인 흐름을 보여왔다”며 “저우 행장도 중국 경제가 고성장-고인플레 시기로 진입하는 것을 막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각국 중앙은행들 코너에 몰려

‘장시성 돼지’는 저우 행장뿐만 아니라 벤 버냉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에게도 골칫거리다. 버냉키 의장은 ‘인플레이션 파이터’라는 별명이 말해주듯, 인플레 퇴치에 정책의 초점을 맞춰온 인물이다. 그런 그도 미국 경제의 최대 현안으로 등장한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를 외면할 수는 없었다. 그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충격을 막기 위해 지난 18일 금리를 0.5%포인트 내렸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던 인플레 퇴치는 뒷전으로 밀렸다.

금리인하는 인플레 압력을 가중시키게 마련이다. 금리인하로 인해 달러 가치가 하락(환율 상승)하면서 수입물가는 더 높아지게 됐다. 가뜩이나 세계 경제는 원자재 가격이 급등하는 등 뚜렷한 인플레 조짐을 보여온 터였다. 그러기에 버냉키는 금리인하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라는 급한 불을 끌 수는 있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이로 인해 더 큰 부담을 안게 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우려하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터진 중국 돼지고기 파동은 금리 딜레마에 빠진 버냉키를 코너로 몰아붙이고 있다. 중국의 물가인상으로 중국 제품의 수출가격이 들썩이고 있기 때문이다.

무역적자와 재정적자에 시달려온 미국 경제가 그래도 버틸 수 있는 힘은 물가안정이었다. 물가가 안정되었기에 금리를 낮은 수준에 묶어둘 수 있었고, 주식 및 부동산 시장의 활황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 물가안정을 가능케 했던 것이 바로 중국이었다. 미국 편의점의 상품 진열대를 장악한 중국 제품이 이를 보여준다.

전문가들은 이번 돼지고기 파동으로 인한 물가인상 흐름이 최소한 내년 상반기까지는 이어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전 세계로 퍼져나가는 중국 제품의 가격이 오를 수밖에 없다. 중국 제품이 그동안 미국 경제에 제공해왔던 물가안정의 시기가 끝나가고 있다는 얘기다. 버냉키의 새로운 고민이 시작된 것이다. 뉴욕 월스트리트가 ‘장시성 돼지’를 주목하는 이유다.

‘장시성 돼지’는 중국 경제가 얼마나 빠르고 깊게 글로벌 경제에 편입되고 있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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