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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데스에서 빚어낸 ‘청자빛 사랑’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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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호 10면

1. 사방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코라오 마을에서 도자기 기술을 전수하는 길동수(뒤에 선 이)·박은미씨.

잉카의 주신(主神)은 비라코차였다. 진흙으로 최초의 인간을 빚었고, 티티카카호에서 태양을 떠오르게 하는 최고의 신이었다. 비라코차는 세상을 창조한 뒤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약속을 남긴 채 서쪽으로 떠나갔다. 1532년 9월 잉카인들은 비라코차가 돌아오는 모습을 보았다. 빛나는 금발에 긴 턱수염, 번쩍이는 투구와 갑옷. 그는 눈부신 갈기를 지닌 네 다리 짐승 위에 높다랗게 앉아 나는 듯 달렸다. 천둥·벼락 같은 소리를 내며 불길을 내뿜는 무서운 물건도 지니고 있었다.

박상주가 만난 사람-페루에서 도예기술 전수하는 길동수·박은미씨

스페인의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와 그 병사들의 페루 입성은 이처럼 인디오들에겐 바로 ‘비라코차의 귀환’이었다. 인디오들은 커다란 방에 사람 키만큼 가득 채운 황금을 바치면서 그들 앞에 무릎을 꿇었다. 지금의 에콰도르와 페루, 볼리비아, 칠레를 호령하던 잉카인들이 300여 년에 걸친 스페인 식민지배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그 식민 체험에서 벗어날 수 없었음일까. 잉카의 후예인 페루 인디오들은 지금 인류의 최빈곤층을 형성하고 있다. 세계의 박애주의자들이 이들을 돕기 위해 몰려들고 있다. 페루 쿠스코에서 만난 도예가 길동수(46)씨와 박은미(35)씨도 이런 사람들이었다.

인간적인 갈증을 풀러 떠난 길
지난 8월 25일 어둠이 밀려오는 저녁 무렵, 잉카제국의 수도였던 쿠스코의 아르마스 광장을 찾았다. 잉카의 비라코차 신전을 허물고 지었다는 대성당이 화려한 조명 속에 미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아르마스 광장을 내려다보는 한 카페에서 동수씨와 은미씨를 만났다. 두 사람은 쿠스코 인근 산세바스티안에 있는 ‘코라오 도자기 학교’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었다.
갈증! 동수씨는 평소 자신의 가슴속에 뭔가 채워지지 않는 인간적인 갈증을 느꼈다고 했다. 그게 무엇이었을까.

2. 산골 벽촌에 자립의지를 심어준 ‘코라오 도자기 학교’의 모습. 3. ‘코라오 도자기 학교’에서 도예기술을 배우는 제자들과 함께 선 길동수·박은미씨(왼쪽에서 셋째, 넷째). 4. 전통 복식을 한 페루 인디오 여성들.

“남미나 아프리카 원주민 중엔 부잣집 개만큼도 먹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동시대를 사는 인간으로서 뭔가를 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쭙잖은 ‘인류애’ 같은 것을 가슴 한쪽에 품고 살았던 셈이지요.”
동수씨는 스스로를 ‘잘나가던 도예가’였다고 했다. 서울 강동구와 경기도 이천 양쪽에 공방을 둘 정도였단다. 강동구청 문화강좌와 특별수업 등 불려 다닌 곳도 많았다고 했다. 그런 세속적인 보따리를 어떻게 포기했을까.

“2004년 6월이었어요. 서울 대학로 근처에서 술을 마신 뒤 차를 놓고 온 적이 있었어요. 다음 날 아침 차를 찾으러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탔습니다. 그때 해외 봉사자를 모집하는 한국국제협력단(KOICA) 홍보물을 봤습니다. 마침 KOICA 본부가 대학로에 있더군요. 그 길로 차를 찾는 일은 제쳐놓은 채 해외봉사자 등록을 하러 갔습니다. 술이 깨고 나니까 고민이 되더군요. 그렇지만 돈은 나중에라도 벌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봉사는 시기를 놓치면 못할 것 같았고.”

은미씨가 봉사활동의 아름다움을 접하게 된 계기는 몽골 여행이었다.
“몽골 여행 중 의료봉사활동을 하고 있던 언니 친구 부부를 만났어요. 세상에 아쉬울 게 없는 의사부부의 헌신적인 봉사는 참 아름다웠습니다. 그때 도자기 회사를 다니고 있었는데 사표를 던지고 KOICA 봉사단에 지원했지요. 거기서 선생님(동수씨)을 만났고….”

고려청자와 잉카문양의 결합
이런 얘기를 나누기 전 아침 무렵, 두 사람과 함께 쿠스코의 주요 교통수단인 ‘티코 택시’를 잡아탔다. 30여 분을 달렸을까. 사방이 높다란 산으로 둘러싸인 코라오에 도착했다. 자급자족을 위한 감자 농사와 가축 몇 마리를 키우는 가난한 인디오들의 마을이었다. 그중 스페인풍의 빨간 지붕과 흰 벽을 한 번듯한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그 앞엔 ‘ESCUELA DE CERAMICA CCORAO’(코라오 도자기 학교)란 간판이 걸려 있었다.

“2004년 10월 처음 이곳에 왔을 땐 허허벌판이었습니다. 도자기 학교를 세운다고 했더니 대부분 주민들은 ‘별 이상한 사람들도 다 있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구청 공무원들과 싸우고, 마을주민들을 설득하느라 무진 애를 먹었습니다. 2005년 3월 전기가마 제작 완료 시점에 맞춰 어렵게 학교 개원식을 할 수 있었어요.” 동수씨의 회고다.
고려청자와 잉카문양의 결합. 동수씨와 은미씨가 이곳 쿠스코에서 원주민 빈곤탈출 방안으로 추진하는 봉사활동 개념이다. 세계적인 인지도를 지닌 한국의 도예기술과 잉카문양이 결합했을 때 ‘시너지 효과’를 볼 수 있다는 게 두 사람의 생각이었다.

“상감기법과 유약처리 등 우리의 도예기술을 접목한 잉카 도자기를 생산할 경우 쿠스코를 찾는 관광객들의 인기를 끌 거라는 판단을 했습니다. 이곳 주민들의 소득증대에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거지요.” 은미씨가 조목조목 설명을 붙였다.
전기물레 설치, 도예센터 준공, 진입로 통나무 다리 공사, 페루식 전통가마 제작 등 일은 꼬리를 물었고 학교 시설을 넓히는 일은 고단했지만 두 사람에게는 신바람 나는 나날이었다.

가난을 이겨낼 힘을 준 도자기 학교
첫 결실을 거둔 때는 2005년 12월이었다. 쿠스코 예술학교에서 연 첫 학생작품전시회에서 일주일 만에 500달러의 수입을 올렸다. 산골 학생들에겐 큰돈이었다. 처음엔 반신반의하던 학생과 주민들이 비로소 팔을 걷어붙이고 돕기 시작했다. 도예기술을 배우면 오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해 11월, 2년 봉사기간을 다 채운 동수씨는 잠시 귀국했다. KOICA에서 재(再)파견 절차를 밟은 뒤 다시 ‘코라오 도자기 학교’로 돌아올 생각이었다. 그런데 주민들이 그 사이를 참지 못한 채 들고 일어났다.
“구청장을 위시한 마을주민, 학생 등 200여 명이 길동수 선생님을 빨리 보내달라는 내용의 탄원서를 만들어 우리 대사관에 보냈습니다. 평소 배타적이고 외부인을 꺼리는 인디오들이 뜻밖의 일을 벌인 셈이지요. 결국 선생님은 올 3월 개인 신분으로 급히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난 6월 KOICA 재파견 절차를 밟았지요.” 은미씨가 들려준 사연은 드라마틱했다.

요즘 두 사람이 가장 공을 들이는 일은 학교 내 공예품 시장 건축작업이다. 올 10월 중순 개장할 예정이라고 했다.
“쿠스코를 찾는 관광객들은 모두 한번쯤 찾을 만한 새로운 명소로 만들 겁니다. 월 수익 3만3000달러, 고용창출 240여 명 정도를 예상하고 있습니다. 물론 전액 코라오 주민들의 몫입니다.”

40대 중반의 노총각 동수씨와 30대 중반의 노처녀 은미씨. 그들은 인디오들의 자립 기반을 다지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다. 그나저나 먼 이국에서 항상 붙어서 생활하는 두 사람, 별일 없을까. 확인 들어갔더니 이 멋쟁이 남녀는 ‘예사롭지 않은 이성 관계’임을 순순히 시인한다. 쿠스코의 봉사와 로맨스! 아, 멋진 인생.


박상주씨는 18년 동안 신문기자로 일하며 다양한 분야의 사람을 만나 얘기 나누는 걸 즐긴 언론인으로 지금은 세계를 방랑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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