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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 보기 싫은 부장은 2천5백번, 엄마는 1백번?

중앙일보

입력


내 오랜 지기인 미수와 유정이. 둘 다 첫 만남부터 예사롭지 않더니 십 수 년이 넘도록 절친하고도 흥미로운 관계를 잘 유지해오고 있다. 미수는 서울의 모 유치원에서 왕따를 당해 울고 있는 것을 내가 나서 구해주면서 친해졌고, 유정이는 여고시절 ‘아버지와 난초’에 관한 약간은 엉뚱하고도 심각한 토론을 하면서부터 서로에게 호감을 갖게 됐다.
늘 산만하고 뭔가 재미난 일을 추구하는 미수는 톡 쏘는 탄산음료 같다고나 할까. 누구보다 최선을 다해 일을 하고 미친 듯이 연애를 하고 또 열정적으로 쇼핑을 하고, 옆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찰 지경이다. 그러나 그녀는 뒤가 무딘 것이 특징이다. 남보다 더 열심히 일을 해놓고도 상사에게 찍혀 승진이 안 되거나, 툭 하면 차이거나, 명품이라고 사놓고 보니 짝퉁이거나, 대게 그런 식이다. 탄산음료에 김이 빠지면 상황은 지루하도록 엉망이 된다. 회사에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 메신저로 상사 흉만 보다가 걸려 시말서를 쓴다거나, 홈쇼핑에 푹 빠져 간장게장을 잔뜩 사들여 살을 찌웠다가 곧 이어서 다이어트 제품을 닥치는 대로 구입하는 등 가관이다.
이쯤 되면 나는 유정이를 찾는다. 그녀는 냉철하고 논리적이다. 코에 걸친 안경을 고쳐 쓰며 늘 그렇듯 바리톤 음성으로 해결안을 제시하는 유정. 미수를 위해 ‘투명 메신저’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모니터 보안 필터를 택배로 보내준다. 투명 메신저라 함은 메신저 창의 투명도를 조절해 언뜻 보면 메신저가 없는 것으로 보이는 프로그램인데 요새 직장인들 사이에서 인기라고 한다. 나야 프리랜서라 투명 메신저가 왜 그토록 인기폭발인지 알 수 없지만 덕분에 미수의 숨통은 좀 트인 모양이다. 사건(?)이 터질 때마다 미수의 분위기에 휩쓸려 덩달아 폐인이 되는 나와 다르게 늘 산뜻한 해결책을 내놓곤 하는 유정. 그런 그녀가 가장 고마운 순간은 미수의 돌발여행을 제지시키는 순간이다.


다짜고짜 트렁크를 챙겨들고 와서 무조건 함께 떠나자고 조를 때 미수를 향한 내 마음은 심란함 그 자체다. 그 짓(?)을 바로 내가 가르쳤기 때문이다. 벌이가 좋고 시간이 넉넉할 때는 까짓 동반해주는 것, 크게 어렵지 않다. 하지만 상대방의 심경이 내 사정 살펴가면서 움직일 리도 없고, 그녀가 나를 닦달할 때는 태반이 바쁠 때다.
더구나 얼마 전에는 명절휴가를 이용해 보라카이에 다녀오자는 것이 아닌가. “명절날 집에 가야지 해외여행이 웬 말이냐?” 날뛰는 내게, 몇 년 전 자신의 성탄절 휴가를 반납했던 케케묵은 일까지 꺼내가며 나를 코너로 모는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겨우 명절이나 돼야 고향을 찾는 내게 그녀의 요구는 너무 터무니없었다.

서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씨름하고 있으려니 유정이가 등장해 안경을 곧추세우며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미수는 큰 충격에 휩싸인 얼굴로 말했다. “너희 부모님들 연세가 어떻게 되지?”로 시작한 유정의 ‘여행제지이론’은 이러했다.
미수의 경우, 작년에 환갑이셨던 엄마와 곧 칠순이 되시는 아버지가 계시니 그분들이 십년 이상 정정하게 잘 사실 거라고 가정을 해도 미수가 그동안 부모님을 찾아뵐 횟수는 1백 번도 채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수는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강원도로 귀농하신 부모님을 찾아가는데 그것도 교통체증이 심한 명절은 피해서 평일에 간다. 미수가 고향에 다니면서 쓰는 비용과 평소 사치를 하며 써대는 비용을 대조해가면서 아무 생각 없이 잘 살고 있는 그녀의 마음에 뜨끔한 풍파를 일으키기 시작한 유정. 그 친구의 마지막 한 마디에 나와 미수는 실로 오랜만에 패닉 상태를 경험했다.
“미수 네가 일 년에 250번 정도 출근하니까 그 회사에 십 년간 계속 다닌다고 가정하면 네 앙숙이라는 부장을 총 2500번 정도 만나는 것이지. 아니다, 넌 시말서 쓰고 주말 근무를 자주하니까 더 보겠다. 그런데 부모님은 일 년에 한두 번 뵙는다면서? 그러니까 십 년간 네가 고향에 내려가는 횟수를 다 합해도 최대 20회 밖에 되지 않아. 이대로라면 부모님께서 해외토픽에 나갈 정도로 오래 사신다고 해도 100번을 채우기 힘들지. 열심히 다닌다고 해도 100번을 채우기가 힘든데, 명절을 앞두고 여행 타령이라니 한심하다.”
말을 마치고 유유히 사라지는 유정, 시골에 내려갈 티켓을 미리 예매해뒀음은 물론이었다. 차표 예매를 깜박 했던 나와 한 술 더 떠서 해외여행 타령을 하고 앉았던 미수는 유정이 나가고 난 후 한참 동안 몇 번이고 반복해서 계산을 해보았다. 한국이 중국처럼 드넓은 땅덩이도 아닐진대, 별로 반갑지도 않은 부장은 수 천 번을 봐야 하는 마당에 나를 낳아주고 키워주신 부모님은 1백번도 뵐 수 없다니!
충혈 된 눈으로 “우리 이젠 집으로 여행 다니자.” 미수의 음성에 나는 거듭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하여 올 명절, 미수는 농촌에서 묵묵히 일하고 계시던 엄마 품으로, 나는 길게 뻗은 아스팔트를 수 시간 달려서 친척들이 모여 있는 본가로 여행을 다녀왔다. 산으로 바다로 해외로 그렇게 흥에 취해 다닐 시간을 아껴 이제는 집으로, 엄마 아부지가 계시는 고향으로 더 자주 다녀야겠다.

설은영 객원기자 skrn77@join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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