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해는뜨고 해는지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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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제1부 불타는 바다 땅끝에 선 사람들(4) 『너무 그렇게만 생각하지 말아.사람이,이 없으면 잇몸으로 산대더라.그래도 어떻게 사람을 죽는 데다가 대겠냐.그렇게라도 살아 있으면 죽는 거보다는 나은 거 아니냐.』 길남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말은 그렇게 했지만 가슴이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인듯 태수도 길게 한숨을 내 쉬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춘식이가 투덜거렸다.
『병원에 분명히 사람이 있는데 인기척도 없이 사람은 그림자도얼씬 안 하는 거여.』 『좀 기다려 보지 뭐.』 춘식이 느릿느릿 말하면서 계단에 걸터앉았다.어두컴컴한 그늘 속에 서 있는 나무를 바라보면서 그가 말했다.
『모르겠다.모르겠어.여기 와서 이 고생하는 거로도 뭐가 부족해서 이런 일들이 생기는지.요새 같아서는 하루 사는 게 열흘같다.』 춘식이가 물었다.
『너는 또 왜?』 『사는게,되는 일은 없고 답답하기만 하니.
』 『배부른 소리 그만둬라.밥 잘 먹고 똥만 잘 싸던데 뭘 그래.』 『이게 말하는 것 좀 봐.임마,내가 똥을 잘 싸는지 어떤지 니가 어떻게 알아.』 『알기만 할까.
너 아침에 뒷간에 가면 도대체가 함흥차사 아녀!대관절 나올 줄을 모른다 그말이다.』 『엇따 그 자식,넌 남이 똥 싸는 거까지 뒷조사 하고 다녔냐?』 『그게 아니라,나도 급해서 달려가보면 언제나 네 녀석이 차고 앉아서 나오질 않더라 그말이다.』『별놈 다 보겠네.』 어둠 속에 앉거니 서서 실없는 소리를 주고 받고 있을 때였다.계단을 밟고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리는가 하더니,여자가 그들의 앞에서 소스라치게 놀라며 걸음을 멈추었다. 『아유 놀래라.거기 누구예요?』 간호부 이시다였다.전에 손가락을 다쳐서 병원에 드나들었던 춘식이가 그녀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앞으로 나서며 서툰 일본말로 아는체를 했다.
『우리 조선사람들입니다.저는 이시다상에게 치료도 받은 적이 있지요.저 모르시겠습니까?』 얼굴이 동그란 노처녀 이시다가 앞가슴을 손으로 감싸며 아직도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밤인데,왜 여기들 있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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