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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창간특집 섹션] 샌드위치 코리아 … 비상구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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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전자는 1990년대 후반 큰 두통거리에 직면했다. 95년에 3억6000만 달러를 들여 인수한 TV 제조사 제니스가 끝 모를 적자에 허덕였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회사를 정리해야 할 상황까지 몰릴 정도로 수렁에 빠진 이 회사를 구원한 것은 원천기술이었다. 98년 말에 미국이 디지털 방송을 시작하면서 이 회사가 개발한 북미식 디지털방송 전송 규격(VSB) 원천기술이 ‘보물단지’가 된 것이다. 손병준 LG전자 IR그룹장은 “제니스의 원천기술 하나만으로 들어오는 로열티 수입이 해마다 수천만 달러에 달한다”고 말했다.

‘애물단지’가 한순간에 ‘효자’로 바뀐 것이다. 이처럼 원천기술은
엄청난 부가가치를 창출하기도 하며 때론 기업의 운명과 업계 판도를 송두리째 바꿔놓을 정도로 위력적이다.

전 세계 기업들은 바로 이런 이유로 원천기술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다. 국내 기업들도 그 전장의 한복판에 서 있다. 핵심 원천기술을 다수 보유하고 있는 일본 기업을 따라잡고, 인건비 경쟁력에다 신기술까지 도입하고 있는 중국 기업의 추격을 뿌리치려면 원천기술을 개발하거나 확보하는 일이 시급한 상황이다.

삼성경제연구소 임영모 수석연구원은 “글로벌 시장은 업계 1, 2위 업체가 시장을 독점하는 승자 독식 현상을 보이고 있다”며 “원천기술을 이용해 표준을 확보한 기업은 다른 기업들이 따라올 수밖에 없는 기술 기반을 보유하게 되는데, 이것이 앞으로 한국 제조업의 나아갈 방향”이라고 말했다.

◆원천기술을 확보하라=한국은 응용 기술 부문에선 세계 최고로 꼽힌다. 그러나 원천기술 부문에선 여전히 변방에 머물고 있다. 국내 기업의 해외 로열티·특허 사용료 지급액은 지난해에만 44억 달러를 웃돈다. 다행히 ‘로열티 수렁’에서 헤쳐 나오려는 움직임이 최근 들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정보기술(IT) 업계의 분전이 눈에 띈다. 와이브로(이동하면서도 초고속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는 무선 휴대인터넷) 핵심 기술인 ‘직교분할주파수다중접속(OFDMA)’ 기술은 세계 특허의 절반 이상(51%)을 삼성전자·LG전자 두 회사가 갖고 있다. 삼성전자는 이를 바탕으로 와이브로 운용 시스템을 무선통신 종주국인 미국 전역에 보급하는 길도 텄다. 중소기업들도 뛰고 있다. 무세제 세탁 기술로 유명한 경원엔터프라이즈는 올 6월 이 회사의 세정수 제조 기술을 국제 표준으로 채택했다.
원천기술을 보유한 기업을 인수합병(M&A)해 그 기술을 아예 ‘내 것’으로 만들려는 움직임도 있다. 두산중공업은 지난해 말 세계 4대 발전설비 원천기술 보유 업체로 꼽히는 미쓰이 밥콕사를 1600억원에 인수했다.

◆국제 기술 표준에서 낙오하면 끝장이다=삼성전자 정보통신총괄 최지성 사장은 최근 “4세대 와이브로 기술인 모바일 와이맥스 외에도 다른 관련 기술도 모두 개발하겠다”고 선언했다. 특정 기술 하나만을 좇다가 낭패를 보지 않기 위한, 일종의 분산 투자 전략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아무리 뛰어난 원천기술을 개발해도 국제 표준으로 채택되지 않으면 금세 ‘죽은 기술’이 되기 때문이다. 전 세계 기업들엔 살벌했던 80년대의 ‘VCR 표준 전쟁의 추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당시 베타 방식을 앞세운 일본 소니는 라이벌인 마쓰시타(VHS 방식)와 VCR 기술 표준을 놓고 맞붙었다가 완패했다. 그 바람에 소니는 시장과 주도권을 완전히 빼앗겼다. 실제로 한국이 반보쯤 앞서 있는 4세대 와이브로 기술 표준 채택을 놓고 각기 다른 기술을 개발 중인 3대 세력 간의 어깨싸움이 치열하다. 이 중 와이맥스(삼성전자·인텔)연합이 가장 앞서 있다. 그 뒤를 LTE(노키아·소니에릭슨), UBM연합(퀄컴·모토로라)이 바짝 뒤쫓고 있다.

 차세대 DVD의 세계 표준 채택을 둘러싼 블루레이 진영과 HD DVD 진영의 대결 역시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진행형’이다. 현재 블루레이 진영엔 삼성전자·LG전자·소니·필립스 등이 손을 잡았다. 반대편 HD DVD 진영엔 도시바·인텔·마이크로소프트 등이 포진해 있다. 다국적 컨설팅회사인 엑센츄어 김정욱 상무는 “원천 기술을 개발하는 능력 못지않게 전략적 동맹군을 규합하는 ‘외교전’ 수행 능력도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표재용 기자
사진=최승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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