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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경제판례 해부] 4. 판결문의 주의해야 할 표현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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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이런저런 이유로 법정에 서본 기업인 가운데 상당수가 "법원의 판결문 내용이 모호한 경우가 많아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고 불평한다.

법정 다툼은 기본적으로 민감할 수밖에 없는 사안인데 이에 대해 법원이 '모호한 표현'을 써 혼란을 불러일으킨다는 호소다. 판결문에서 '사회적으로 용인하는 범위' '사회적 통념 기준' 등의 표현이 적지 않다는 이야기다.

이에 대해 법원 관계자들은 "포괄적으로 표현한 판결문의 의미를 잘 살펴볼 것"을 주문한다. 복잡한 사건을 일일이 설명할 수 없는 만큼 그 판결 배경을 잘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대법원의 손지호 공보관은 "판사는 사건마다 구체적인 사실을 모두 고려하기 때문에 판결문에 일부 모호한 기준과 표현이 있다고 해도 종합적인 판단은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특히 법원이 경제판례에서 '사회적 통념' 등을 강조하는 것은 기업에 좀더 엄격한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고 있는 추세로 해석해야 한다는 주문이다.

대법원은 지난해 7월 판결문에 "주주총회 개회시각이 지연된 이유가 '사회통념'에 비춰 볼 때 그 정도를 넘었기 때문에 불공정하다"고 밝혔다.

국민은행은 2000년 3월 18일 오전 10시 정부 기관 인사를 신임행장으로 선임하는 건 등을 위해 주총을 소집했다. 그러자 노조는 '관치금융에 의한 낙하산 인사'라며 이에 반대해 일부 주주들의 주총장 진입을 제지했다. 은행 측은 예정보다 12시간 이상을 넘긴 이날 오후 10시15분쯤 주총 장소를 은행장 직무대행실로 바꿔 주총을 연 뒤 이 안건을 통과시켰다. 이에 따라 소액주주들이 주총 소집절차에 문제가 있다며 소송을 냈다. 은행 측은 "노조 농성으로 주총장 진입이 불가능했고, 바뀐 주총에 의결권 50% 이상 지분이 참석해 문제가 없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법원은 이에 대해 "사회통념상 주총 개회시각 지연이 그 정도를 넘어 주주들의 참석을 기대하기가 어려웠다"며 "소집절차가 현저히 불공평하다"고 했다. 판결문은 이어 "주총 소집권자가 대체 장소를 정해 주주들에게 알리고 이에 필요한 조치를 취할 때에 한해 적법하게 장소가 변경됐다고 볼 수 있다"고 밝혔다.

법원은 '사회통념'이라는 포괄적 표현으로 은행 측의 무리한 주총을 지적한 것이다.

대법원은 설계상 잘못으로 인한 제조물책임 소송에서도 '사회통념'을 강조했다.

헬기 조종사가 날씨가 흐려 계기만을 보고 비행하던 중 기계 속도 표시가 잘못돼 추락한 사건에서다. 제조업체가 경고등 장치 등을 더 좋게 만들 수도 있는데 이를 소홀히 했다고 조종사 측이 소송을 했다.

법원은 이에 대해 설계상 잘못을 따지려면 사회통념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는 취지의 판결을 했다. 현재 갖춘 정도 장치만으로도 통상적인 안정성은 갖춘 것이며, 비행교범으로 비정상 작동 가능성을 경고하고 대처법을 소개했으므로 제조자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SK그룹 비상장 주식 맞교환 사건에서 서울지법은 지난해 6월 판결문을 통해 비상장 주식 가격산정 기준을 '사회적으로 용인하는 범위' 등으로 규정했다. 법원은 최태원 회장이 워커힐 비상장주식과 SK C&C가 보유한 SK㈜ 주식을 맞교환한 것을 배임죄라고 인정했다.

김상균 부장판사는 "사회적 용인범위란 사건마다 다를 수 있다"며 "SK는 거래 당사자나 가격 등을 전반적으로 살펴볼 때 사회적 용인 범위를 벗어났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판결문에서는 이런 판단 근거로 ▶실질적인 교환가격 흥정 절차 없이 崔회장의 지시로 이뤄졌고▶교환가격에 대한 평가과정이 없었던 점 등을 지적했다.

자유기업원의 박양균 법경제팀 선임연구원은 "판결문의 모호한 표현은 헌법재판소의 '판례 명확성 원칙'에 위배되는 내용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경실련의 위평량 경제정의연구소 국장은 "입법의 불비(不備)로 말미암아 보충할 수밖에 없는 경우 법원은 정의의 관념에 따라 판단할 수밖에 없다"며 "추상적 판단기준을 제시하는 것은 부득이한 일"이라고 설명했다. 최원영 변호사는 "업무상 과실의 경우 '통상의 주의의무를 게을리한 것'이 기준이 된다고 하지만 판사가 구체적 증거를 종합해 판단하기 때문에 문제는 없다"고 말했다.

김시래.염태정.강병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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