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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 레저] '티베트' 지구 끝 무인구엔 절대 고독과 태고의 별빛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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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인구에서 만난 유목민. 티베트 전통 의상의 다채로운 색이 눈길을 끈다.

지구 끝 無人區엔 절대 고독과 태고의 별빛
'저 높은 정신의 땅'을 가다

티베트(Tibet).

세계의 지붕이라고만 알고 있는 곳. 설명을 붙이자면 평균 해발고도 5천m, 한해 8개월은 눈이 내리는 동토지대다. 이곳을 고희를 훌쩍 넘긴 노교수가 다녀왔다. 경희대 중문과 명예교수 박철암(朴鐵岩)옹. 이번이 벌써 열세번째다.

무엇보다 이번 도전은 특별하다. 지도에도 제대로 표시되지 않은 티베트고원 한복판의 무인구(無人區)를 다녀온 것이다. 지난해 9월 11일부터 10월 18일까지의 여정. 노교수는 문명의 때가 묻지 않은 이곳을 "황막한 초원과 싸늘한 별이 반짝이는 설산, 쪽빛 하늘, 신비한 호수, 그리고 티베트에만 자생하는 꽃, 그 어느 것도 경이롭지 않은 것이 없다"며 찬양한다. 모험은 낭만의 다른 말이라고 했던가. 출판을 준비 중인 그의 원고와 사진을 어렵게 입수해 태고의 신비를 향한 노익장의 생생한 숨소리를 전한다.

◆ 기묘한 나무춰(納木措).서린춰(色林措) 호수

9월 17일 라사에서 차량 두대와 기사.안내원.요리사를 구한 뒤 식료품.텐트 등 장비와 실험조사 기기 등을 싣고 나무춰 호수를 향해 출발했다. 나무춰 호수의 면적은 1천9백40㎢, 해발고도는 4천7백59m, 티베트에서 제일 큰 호수로 옛날 스페인의 탐험가 헤딩 박사가 탐험한 곳이다. 반나절 넘게 차를 달려 가까이서 호수를 바라보니 비취색 하늘에 수평선이 맞닿아 어디가 끝인지 알아볼 수 없다. 호숫가에는 여기저기 유목민들이 흩어져 양떼를 몰고 있는데 천상에 사는 것 같았다.

다음 목적지인 서린춰 호수로 향했다. 유달리 비가 많이 내려 초원에 습지가 많이 생겼다. 습지에 빠진 것만도 10여차례, 결국은 예정보다 이틀이나 늦어서야 서린춰 호수에 닿았다. 때는 이미 석양! 하늘은 진홍색으로 변하고 호수의 색채도 어떤 곳은 비취색.녹색.연한 녹색 등 여러가지 색깔로 변하고 있었다. 하늘도 붉은색에서 점점 자홍색으로 바래지고 잠시 후 검은색으로 변한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장관이었다.

◆ 다시 무인구로

룽마에 도착한 것은 9월 22일. 2002년엔 인가가 다섯집에 불과했는데 20호가 늘어 큰 마을이 되었다. 이곳에서 현지 안내원 두명을 고용했다. 한사람은 샹페이, 또 한명은 우투초마제. 그들과 함께 말커차카호로 향했다.

오늘의 일정은 장서강르(藏色崗日)산 지역이다. 룽마에서 거리는 약 2백90㎞. 자린산을 넘으면 곧 무인구지대다. 이곳의 아침 기온은 영하 2도. 눈에 보이는 것은 광활한 누런 초원, 구릉같은 산과 설산뿐이다. 얼마를 달렸을까. 멀리 강탕(剛塘)호가 보인다. 안내원 우투초마제는 "이 호수는 염수호도 아닌데 추운 겨울 영하 30~40도에도 얼지 않습니다.

더욱이 특이한 것은 작은 새들이 호수로 날아 접근하면 호수로 빨려 들어갑니다. 어떤 야생동물도 이 호수의 물을 먹지 않습니다"라고 한다. 처음 들어보는 신비한 이야기다. 도대체 이 호수에는 무엇이 있기에 새들이 날아가다가 빨려 들어가는가? 소금물도 아닌데 영하 30~40도에도 얼지 않는가?

호반에서 잠시 쉬고 나서 다시 초원을 달려 말커차카호를 지났다. 여기서부터는 영겁의 침묵을 지키는 무인구다. 한국인으로는 처음 들어간다고 생각하니 절로 숙연해진다. 들녘에는 야생동물들이 풀을 뜯다 말고 우리 차량을 신기한 듯 쳐다본다.

그리고 얼마나 달렸을까. 갑자기 현지 안내원이 "서우강르산이 보인다"고 소리쳤다. 서우강르산을 처음 보니 감개무량하다. 거리는 20㎞ 내외. 설원 위에 두개의 봉우리가 앞뒤로 솟아있는데 어느 것이 주봉인지 알 수 없다. 빨리 가서 보고 싶은 생각에 마음이 설렌다.

쉬는 동안 초원 돌밭 해발 5천5백m지대에서 아레나리아의 일종인 희귀 식물을 수집했다. 이번 탐사에서 얻은 가장 값진 소득이라고 생각한다. 계속 초원을 달리던 자동차가 갑자기 멈췄다. 전면에 커다란 습지가 앞을 막고 있기 때문이었다. 모두 차에서 내려 위로.아래로 건널 수 있는 지점을 찾아 보았으나 만만한 곳이 없다. 서우강르산을 눈앞에 두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시계를 보니 오후 7시. 룽마에서 이곳까지 1백80㎞. 지명을 물으니 즈라툰뉘라고 한다. 무인구를 찾아 7년, 그간의 고생을 생각하니 통한의 눈물이 흘러 나온다. 그러나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숙의 끝에 오늘은 말커차카호에서 자고 약 3백30㎞ 떨어진 창둥(昌東)지역으로 가 새로운 루트를 찾기로 했다.

◆ 말커차카 호반의 유목민

지구 끝 같은 말커차카 호반에 유목민 한가족 8명이 살고 있다. 차가 유목민 집 앞에 이르니 그들은 자동차 소리에 놀라 가족 모두 집 앞에 나와 있었다. 지난번 탐사 이후 일년 만에 다시 만나는 이들이다. 인사를 하니 얼른 나를 알아보고 반갑게 맞아주었다. 나는 가지고 온 선물과 지난해에 찍은 사진 한장을 내놓았다. 그들은 사진 속의 자기 모습을 보고는 신기한 듯 어린아이처럼 깔깔대고 웃는다. 바깥세상을 모르고 살아온 그들은 어쩌면 자기 얼굴 사진도 처음 보는지 모른다.

방에 들어가니 찌든 야크 기름 냄새가 코를 찔렀다. 가구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는 구석에서 어린아이 울음소리가 나 보니 생후 10개월쯤 돼 보이는 두 아이가 양가죽 부대 속에 꽁꽁 묶인 채 들어있는데 한 아이는 울고, 한 아이는 인형같다. 이어 엄마가 달려가 양가죽 부대를 껴안고 젖을 물렸다.

◆ 말커차카호 탐사

아주 먼 옛날 티베트 고원은 터티스해라는 바다였다. 이 바다가 융기하면서 히말라야 산맥과 티베트 고원이 생성됐다. 그 과정에서 티베트 고원에는 크고 작은 호수 1천5백개가 생겼고 그 중 무인구에는 염호(소금호수) 17개 분포돼 있다. 이 말커차카호도 그 중 하나다. 호수의 길이는 약 3㎞. 폭은 8백m 정도 되는 것 같았다.

이번 탐사 계획 중 하나가 호수의 생태계를 연구하는 일이다. 고무보트를 들고 호숫가로 나갔다. 호수에는 강한 찬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고 있었다. 배에 오르자 모두 우려하는 표정이다. 나는 먼저 30m짜리 그물을 늘어놓으며 나갔다. 그물에는 물고기 한마리 걸려들지 않았다. 물맛을 보니 쓰디쓴 소금물이었다. 수초도 이끼도 수생 곤충도 있을 리 없다. 줄에 돌을 달아 수심을 재보니 깊은 곳은 10m가량 됐다.

그런데 보트에 물이 차기 시작했다. 바닥에 작은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러다가 호수를 건너기 전에 보트가 물속에 가라앉을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힘껏 노를 저어 밖으로 나왔다. 나와서 보니 옷은 소금물에 젖어 흰색으로 변했다. 그러나 옷에 묻은 소금이 4천만~5천만년 전의 것이라고 생각하니 옷에 붙은 소금이 소중하게 보였다.

◆ 방황 뒤의 허탈감

9월 25일 아침 창둥을 향해 출발했다. 도착한 것은 밤 12시. 인가가 네 집 있는데 몇백m씩 떨어져 있었다. 지명도 바뀌어 차오무(草牧)라고 한다. 알아 보니 장서강르 산 가는 길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더욱이 난제가 생겼다. 자동차 기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1백50㎞ 떨어진 차부샹으로 갔으나 여의치 않아 1백80㎞ 떨어진 카이저로 왔다. 도착해 보니 기름도 다 떨어지고 차까지 고장났다. 기사 이야기로는 라사에 가서 부속품을 구해 오자면 보름이 걸린다고 한다. 어찌하랴! 이번 2차 티베트 무인구 탐사도 아쉬움을 안은 채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인생은 추구하는 내일이 있기에 존재의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닐까. 새로운 탐험의 의지를 다지며 티베트를 떠났다.

박철암 경희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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