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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비서실>176.불발로 그친 衛戌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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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87년 6월 항쟁의 결과로 6.29가 나왔지만 이는 민주화 대장정의 마감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했다.6.29이후 정치적 시위는 사라진 대신 노사분규의 불길이 전국으로 번져갔다.되찾은 자유가 더 많은 빵의 분배를 요구했던 것이다.다행 히 우익군부정권의 인내속에 민주화의 격동기는 무난히 넘어가「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기보다 요원」했던 우리의 민주화는 제자리를 잡아갈 수 있었다.
그런데 「무난히 넘어갔다」고 여겨지는 그 과정에서 사실은 일촉즉발의 위기가 한차례 있었다.위기란 다름아닌 軍출동을 위한 위수령 발동이었다.
87년 8월「노동자 대투쟁」이라는 슬로건하에 전국에서 노사분규가 끊이지 않았다.당시는 노동운동의 질적 전환기였다.
특히 분규가 심했던 곳은「현대市」로 통하던 울산이었다.수만명의 노동자가 밀집해 있는데다 많은 중장비까지 시위용으로 동원돼시위현장은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마침내 9월2일 현대중공업 시위노동자들은 지게차.크레인.컴프레서등 중장비를 앞세우고 공단을출발,시내로 진출했다.당초 노조집행부는 그야말로 위력시위만 하고 돌아가려 했으나 흥분한 시위노동자중 일부가『물러서면 안된다』라며 시청으로 난입,유리창과 내부집기를 닥치는대로 던지고 부수기 시작했다.
全斗煥대통령이 긴급노동대책회의를 소집한 것은 이 무렵이었다.
당초 청와대비서실측은 노동대책회의인만큼 국방장관을 부르지않았다.그런데 회의장에 국방장관이 없자 全대통령이 국방장관을 부를것을 지시했다.盧泰愚대통령만들기의 공신인 鄭鎬溶국방장관은 그래서 뒤늦게 참석할수 있었다.
鄭鎬溶의원의 기억.
사태의 심각성을 우려하고 내각의 미온적인 대처를 꾸짖는 全대통령의 훈시로 대책회의가 끝났다.全대통령은 회의가 끝난뒤 鄭장관을 집무실로 따로 불렀다.
全대통령은『도저히 안되겠어.울산지역에는 최소한 위수령을 내려야겠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대통령의 단호한 어조에 鄭장관은 정면으로 반대하지 못했다고 한다.대신『알겠습니다.언제고 출동할 수 있도록 준비태세를 갖추겠습니다.그런데 군을 출동시키는데는 시간이 필요합니다.군을 출동해도 여유가 있게 해야지 갑자기 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라고 건의했다.鄭장관은 면전에서 반대는 못하고 대신 시간을 벌은셈이다. 鄭장관은 청와대를 나오자마자 군에 일단 대기명령을 내렸다. 다른 한 관계자 Q씨는『全대통령이 처음에 지시한 위수령발동과 군출동의 D데이는 9월 4일』이라고 증언했다.그는『全대통령은 3일 鄭장관에게「24시간내 출동」을 지시했었어요.그런데鄭장관은 시간이 필요하다며「48시간내 출동」을 허락받 았죠.그러니까 全대통령이 당초 지시한 D데이는 4일이고,鄭장관이 시간을 늦춰잡은 D데이는 토요일인 5일인 셈이죠』라고 기억했다.
Q씨의 기억에 따르면 鄭장관은 3일 각군 수뇌부를 국방부로 소집했다.군출동 준비상황을 점검하기 위한 회의였다.
이날 회의에 뒤늦게 참석한 사람이 있었다.鄭장관이 국방부에서열린 회의장에 들어서 회의참석자를 확인하고는『정보본부장도 불러와』라고 지시했다.그가 찾은 사람은 尹泰均국방정보본부장(현 민자당 의원)이었다.尹본부장은 全대통령이 직접 장 악하고 있던 군내에서 몇안되는 盧泰愚사람인 동시에 盧泰愚대통령 만들기 멤버인 鄭장관의 측근이었기에 참석대상이 아닌데도 특별히 부른 것이다. 尹본부장은 경북 청송출신으로 대구에서 자랐다.경북고 35회로 盧총재의 3년 후배.그는 또 육사 13기로 盧총재의 2년후배인 동시에 하나회 후배다.87년 당시 그는 盧총재에게 군내사정을 자문하는 현역장성중 한 사람으로 연희동 사저 를 들락거렸다.그래서인지 그는 그해 12월 全대통령의 마지막 군인사에서군복을 벗었다.하지만 6공 들어서 곧바로 도로공사사장이 되고 盧대통령의 임기말인 92년 구성된 14대 국회에 전국구의원으로금배지를 달았다.
尹의원의 기억.
각군 총장들이 위수령이 내려졌을 경우 군을 어떻게 통제하며 어떤 부대를 현장에 투입하고,그경우 그 부대의 경계는 어떻게 보완할 것인가등을 보고했다.鄭장관은 회의말미에『아무 차질이 없도록 만전을 기하라』고 다짐을 놓았다.군출동준비가 끝난 셈이다. 尹본부장이 나선 것은 회의가 끝나고 鄭장관과 둘만이 남았을때였다.尹본부장은『그런데 군출동 명령권을 누가 가지고 있습니까』라고 말문을 열었다.이는 명령권을 몰라서 물었다기 보다 다음말을 꺼내기 위한 주위환기였다.尹본부장은『누가 이번 일에 책임을 지는 것입니까』라고 이어 물었다.
책임과 권한을 명확히 알기위해 鄭장관이 법무관을 불렀다.법무관의 답변은『위수령이 떨어지면 군출동의 책임과 명령권은 그 지역의 위수사령관이 가집니다.필요하면 위수사령관이 참모총장에게 군지원을 요청할 수 있습니다』라고 법적인 책임과 권한을 설명했다.尹본부장은 곧바로 말을 이었다.
『그러면 장관은 권한이 없는 것 아닙니까.법적으로 책임질 수도 없습니다.위수령이 떨어지면 군이 출동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군이 최악의 경우 발포했을 때 시위대가 도망가느냐는 것입니다.시위대가 총알도 안무서워하고 달려들면 제2의 광주사태가 됩니다.이번 사태는 정치적 배후가 있습니다.발포하더라도 도망가지 않을 겁니다.유혈사태가 일어나면 선거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칩니다.이럴때 군을 투입하면 민심이 거꾸로 갑니다.』尹본부장의 결론은『그러니까 이 문제는 대통령선거에 출마할 盧泰愚총재와 의논해야 합니다』였다.
鄭장관은『맞는 얘기다』라고 동의를 표한뒤 곧바로 盧泰愚총재를찾았다. 鄭장관은 곧이어 盧泰愚대통령만들기 멤버이자 군후배인 安武赫안기부장을 찾았다.鄭장관은 전화가 연결되자『청와대회의에서얘기됐던 문제,재고해야될 일이 있소.내일 아침 盧총재와 조찬하기로 했으니까 참석해주시오』라고 말했다.
4일 아침 鄭장관의 얘기를 들은 盧총재는 당연히 펄쩍 뛰었다.다시 鄭의원의 기억을 빌려보자.
盧총재는 청와대의 결심사실을 듣자마자『그랬다가는 정국을 망친다.후보를 사퇴하는 한이 있더라도 막아야한다』고 말했다.그래서일단 안기부장이 재건의를 올리기로 했다.명분은『5공 들어 한번도 군을 출동하지않았는데 굳이 임기말에 군을 동 원하는 것은 모양이 좋지않다.일단 경찰력으로 최선을 다해보자』였다.
다른 한 관계자 Z씨는『당시 안기부장뿐 아니라 高明昇보안사령관등 많은 사람들이 군출동 결심철회를 주장했죠.盧총재도 물론 全대통령에게 위수령결심 철회를 강력히 요구했습니다.여러 사람이반대한만큼 全대통령은 그날(4일)바로 군출동결심 을 철회했습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5공측 인사들은 당시 全대통령의 위수령발동 결심은「경고용」에 불과했다고 주장했다.
安賢泰경호실장은『6.29 직전에는 진짜로 군대를 동원해 일부군인들이 기차를 타고 출동하던중에 명령이 취소된 사실이 있지만9월에는 그 정도는 아니었어요.노사분규가 심각하다고 생각은 했었지만 全대통령이 진짜 군을 출동해야겠다고 생 각할 정도의 위기상황이 아니라는 얘깁니다.6.29 직전에는 진짜 체제가 전복될 정도의 위기감이 있었죠.경찰력으로 한계가 있으리라는 판단도있었고요.하지만 9월 노사분규는 체제위기라고까진 볼 수 없어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다른 5공 관계자는 당시의 위기감에 대해『全대통령은 노사분규가 단순한 분규가 아니라 불순한 배후,다시말해 용공세력이 배후에서 작용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습니다.청와대에서는「이러다가 울산 무너지고 포항까지 무너지면 우리는 뭐 먹고 사느냐」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산업마비에 대한 위기감이 상당했죠』라고 증언했다.배후가 있다는 말은 尹泰均정보본부장이 주장한 내용과 같아 주목된다.
***“警告用이었을 뿐” 반면 6공측 관계자 X씨는『실제로 위수령이 발동되지않았으니까 지금 와서「경고용」이었다고 얘기할수도 있겠죠』라고 5공측의 주장을 반박한뒤『하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당시 상황에서 위수령발동은 단순한 분규진압에 그치는 일이 아닙니다 .6공화국이 탄생하는 과정,크게봐 우리헌정사에서아주 극적인 순간이었죠』라고 주장했다.그는『거스를 수 없는 대세인 민주화요구를 軍출동으로 가로막는다는 것은 6.29이후 진행돼온 정치일정을 무시한다는 의미죠.90년 이후에는 노사분규에경찰이 대규모 투입되기만 해도 농성중이던 노동자들이 다 도망갔습니다.하지만 87년 당시에는 군이 나선다 해도 물러설 분위기가 아니었죠.그러니 진짜로 군이 출동하면 당연히 걷잡을수 없는사태가 벌어질 것은 불을 보 듯 뻔하잖아요.그 러면 곧 이어질대통령선거가 제대로 되었겠습니까.6공 탄생 대신 5공정권의 연장이나 또다른 5공 정권의 탄생으로 역사가 후퇴했겠죠』라며 全대통령의 底意를 의심했다.
어쨌든 全대통령은 위수령을 발동하지 않았다.
盧총재는 4일 미국 월스트리트 저널紙와의 인터뷰에서『현재의 노사분규는 정부의 통상적인 대처능력으로 충분히 수습할 수 있으므로 軍이 나설 필요는 없다』고 큰소리쳤고,인터뷰내용은 국내 각 일간지에 인용보도됐다.그리고 열흘뒤인 14일 盧총재는 아무일도 없었다는듯 선거운동용 미국방문길에 나섰다.5공 최후의 위수령,민주화요구를 軍이라는 무력으로 막고자했던 마지막 시도는 이렇게 역사속에 묻혔다.
〈吳炳祥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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