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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프라이버시 정치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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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사생활이란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은둔의 영역”이다(조르주 뒤비). 지금은 당연해 보이지만, 근대의 산물이다. ‘국가로부터의 자유’란 사생활 개념은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수립됐다. 이 시기 국가 권력에 대한 개인의 왕성한 투쟁이 법·정치·문화 제도로 정착됐다.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라는 사생활 개념은 19세기에 등장했다. 물론 초기에는 부르주아의 전유물이었다. 부르주아의 집에 등장한 응접실은 사생활과 공적 생활 사이에 놓인 이행공간이었다. 반면 노동자의 집에는 이웃 사이에 담조차 없었다. 공과 사가 뒤섞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보면 사생활을 누린다는 것 자체가 계급적 특권이었다. 『사생활의 역사』는 그래서 20세기를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엄격하게 구분하는 관행이 모든 계층의 일상 생활을 규정하는 원리로 확대된 시기”라고 정의한다. 사생활의 민주화다.

 사생활 개념이 역사적 산물이라는 것은 공·사 구분이 시대에 따라 달라짐도 뜻한다. 한때 공적인 영역이던 것이 사적인 영역이 되고, 사적인 영역이 공적 영역으로 넘어가기도 한다.

 최근의 경향은 엄격한 공·사 구분의 붕괴다. 특히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공·사의 경계를 허무는 강력한 변수다. 가령 미니 홈피는 아예 공·사가 뒤섞인 공간이다. 지극히 사적인 공간이면서 동시에 대중에게 열려 있다. 홈피 주인은 사적 공간으로 생각하지만, 방문객들은 공적 공간으로 이해한다. 사적인 사진·글들은 금방 ‘펌’을 통해 공중에 공유된다. 무수한 ‘UCC 스타’들은 스스로 사생활 노출을 즐기는 문화 트렌드를 보여준다.

 최근 온 나라를 뒤흔든 ‘신정아 사태’는 나아가 디지털 공간이 기술적으로도 사생활 보안에 취약하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신씨가 삭제한 개인 e-메일을 상당수 복구하면서 검찰 수사가 진행됐기 때문이다. 한번 ‘보내기’를 누르면 절대 취소할 수 없는 e-메일처럼, 컴퓨터상 정보의 흔적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는 공포스러운 사실의 확인이다.

 문화평론가 진중권은 “(역사상) 공과 사를 나누는 벽을 두고 양쪽에서는 끊임없이 삼투압 운동이 일어난다. 문제는 요소들을 어떻게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에 배분하는가다. 여기에 ‘프라이버시의 정치학’이 있다”고 썼다. 이제는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과거의 ‘계급’만큼이나 ‘프라이버시 정치학’을 결정짓는 중요 변수가 되고 있는 듯하다.

양성희 문화스포츠 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