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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 위용에 입을 쩍 벌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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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내게는 (경성역 그릴의) 이 서글픈 분위기가 길거리 티-룸들의 거추장스러운 분위기 보다는 더 절실하고 마음에 들었다. 문을 닫을 때까지 앉아 있는 경우도 많았다. 커피-. 좋다." 이상(李箱)의 대표작 '날개'의 이 구절은 경성역사 2층 '티룸(다방)'과 모던음료 커피에 대한 자전적 증언이다.

근대의 상징이던 역 다방의 고급스러움 앞에 "문을 닫을 때까지" 죽칠 정도로 매혹됐으면서도 왠지 "서글픈" 것이다. 엘리트가 그 정도이니 식민지 백성들은 말할 것도 없다.


르네상스·바로크 양식을 절충한 1925년 완공 직전의 서울역사(왼쪽)는 식민지 조선백성들에게 '모던'을 상징했다. 오른쪽은 1903년 모던 풍경으로 등장한 일본의 열차내 찻집 삽화.

신간 '모던의 유혹, 모던의 눈물'(노형석 지음, 생각의 나무)은 1925년 완공된 이 건축물의 위용 앞에 "경성 부민들은 입을 쩍 벌렸다"(43쪽)고 전하고 있다.

*** 정치사 아닌 생활사에 조명

일제가 이식한 '껍데기 모던'은 유혹만큼 눈물도 강요했음은 물론이다. 역 부근 빈민들의 하루살이 삶이 그것이고, 그 장면은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하루'가 증언한다. 알고보니 박래품(舶來品) 커피의 일본 상륙도 간발의 차이였다. 역시 새로 나온 '풍물책 이상의 연구서'인 '일본 근대의 풍경'(유모토 고이치 지음, '연구공간 수유+너머'옮김, 그린비)을 펴보자.

일본의 경우 탈아입구(脫亞入歐).문명개화를 내건 메이지 시대 초기인 1888년에야 본격적인 찻집이 문을 열었다. 당시 도입된 목판인쇄술의 등을 타고 등장한 삽화에는 1889년 근대적 사교공간으로 문을 연 찻집 풍경도 들어 있다. 테이블 위에 서양식 잡지가 놓여있고, 일본 모던 보이들은 담소에 정신이 없다. 그들 역시 1853년 페리 제독의 흑선(黑船)이 몰고온 근대의 풍경에 얼떨떨하면서도 매혹된 것이다.

'모던의 유혹, 모던의 눈물''일본 근대의 풍경' 두 권은 최근 서점가의 읽을거리로 등장한 모더니티 탐구서들의 경향을 잘 반영한다. 원조는 2000년에 나온 '현대성의 형성-서울에 딴스홀을 허(許)하라'(김진송 지음, 현실문화연구). 지난 한해만해도 '모던 보이 경성을 거닐다'(신명직 지음, 현실문화연구), '매혹의 질주, 근대의 횡단'(박천홍, 산처럼), '연애의 시대'(권보드레 지음, 현실문화연구), '근대의 글쓰기'(천정환, 푸른역사) 등 4권을 탄생시켰다.

이들의 공통점은 생활사 혹은 문화사 조명이라는 점이다. 포스트모던 역사학에서 중시하는 미시사(微視史)쪽 흐름을 탄 것이다. '근대사=정치사'라는 등식에서 멀찌감치 벗어나고 있고, 그간 주류를 이뤄온 서양 근대사 번역서에서 벗어난 것도 그 때문이다.

*** 현재와 다름 없는 삶 엿보여

또 있다. 우리의 근대를 들여다보는 리얼한 '우리 얘기'는 무엇보다 그리 어렵지가 않다. 사료집을 겸한 연구서이면서도 대중적인 코드를 유지한다. 생각해 보라. 근대 도시 경성을 누비는 모던걸.모던보이들이 열광한 품목들은 현재 우리가 사는 세상과 별 차이가 없다. 영화.라디오 등 막 등장한 대중미디어.'딴스'.유성기.카페.자동차 드라이브.백화점 쇼핑.창경원 벚꽃놀이.문화주택(2층 양옥)….

하지만 이런 읽을거리들이 근대 연구를 위한 첫 걸음을 막 뗀 단계라는 한계 역시 부정할 수 없다. '모던의 유혹, 모던의 눈물' '일본 근대의 풍경' 두 권은 그동안 근대 연구의 지평을 넓히는 새로운 시도라 평가할 만하다. '모던의 유혹, 모던의 눈물'의 경우 서지학자 사운 이종학(1927~2002년)선생의 4백점 가까운 새로운 사진자료가 보석처럼 박혔는데, 저자의 날렵한 글과 좋은 궁합을 보여준다.

'일본 근대의 풍경'의 경우 모두 3권으로 선보일 '동아시아 근대풍경 시리즈'의 첫권이라는 점이 듬직하다. 앞으로 선보일 '중국 근대의 풍경''한국 근대의 풍경'등은 근대의 초기 모습을 추적하되, 근대가 부추겨온 내셔널리즘의 함정에 빠지지않겠다는 의지가 배어 있다.

조우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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