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행유예 받은 정몽구 회장 판결문 살펴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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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의 오데마치 펀드, 홍콩의 글로벌 호라이즌 펀드, 영국령 버진 아일랜드의 NCI펀드….’

이름을 보면 분명 해외펀드이지만 현대자동차가 만든 것으로 드러났다.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이 6일 횡령 혐의 등에 대한 항소심에서 3년 징역, 5년 집행유예와 사회봉사명령을 받은 판결문에 나타난 사실이다.

이번 재판을 맡은 서울고법 제10형사부는 판결문에서 정 회장과 현대차그룹이 계열사 경영권 유지를 위해 탈법적인 방법으로 역외펀드를 동원해 배임과 횡령을 했다는 검찰과 원심의 판단을 그대로 인정했다. 이 판결문에 나타난 역외펀드는 ‘오데마치’

‘멜코’ ‘굿 펠로우즈’ ‘글로벌 호라이즌’ ‘NCI’ 등 총 5개다. 말레이시아 라부안, 영국령 버진아일랜드, 홍콩 등 대표적인 조세회피지역에 주소를 뒀다. 이들은 현대강관(현 현대하이스코)·인천제철(현 현대제철) 등의 지분을 사들이며 ‘외국계 투자자금’으로 행세했다.

현대차 측은 이들 펀드의 사실상 주인이면서도 그간 자신들과는 무관하다는 입장을 보여 왔다. 이 같은 펀드는 한국인이나 한국 기업이 투자한 것이면서도 외국계로 위장한다 하여 이른바 ‘검은 머리 외국인 펀드’로 불린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자금추적에서 자유롭기 때문에 비자금을 마련하고 경영권을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상당수 국내 기업들이 이를 활용했다”며 “외국인 지분이 많아 경영권이 위험하다고 엄살을 피우면서도 구체적인 대응책을 마련하지 않는 것도 역외펀드의 이름을 빌려 위탁(파킹)해둔 지분이 많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어떻게 이용했나=외환위기 직후 옛 현대그룹은 주거래은행인 외환은행과 재무구조개선약정을 맺었다. 현대강관을 해외 매각이나 외자 유치를 통해 계열 분리키로 합의한 것. 현대강관은 당시 ‘돈을 빌리거나 만들기 위해 구걸하다시피’ 해야 했을 만큼 자금사정이 어려웠다.

주가는 1999년 12월 액면가(5000원)를 밑도는 4700원까지 떨어졌다. 하지만 ‘철’에 대한 애착이 강한 정 회장은 현대강관을 내놓을 생각이 없었다. 이에 따라 현대차는 그해 12월 일본 스미토모·미쓰이상사의 손을 빌려 말레이시아 라부안에 오데마치펀드를 설립한 뒤 현대강관 유상증자에 참여케 했다. 시세보다 비싼 액면가로 유상증자가 실시된 탓에 대규모 실권이 발생했고, 오데마치는 단숨에 3648만 주(40.79%)를 보유한 대주주로 떠올랐다.

판결문에 따르면 현대차는 계열사였던 현대중공업과 함께 5000만 달러를 투자해 홍콩에 글로벌 호라이즌이라는 역외펀드를 만들었다. 그런 뒤 이 회사가 오데마치펀드에 다시 투자하게 하는 방식으로 유상증자를 주도했다.

하지만 현대강관은 여전히 유동성 위기에 시달렸고, 주가도 액면가를 밑돌았다. 현대차는 다시 인천제철과 함께 5100만 달러를 투자해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에 NCI펀드를 만든 뒤 주당 4000원에 이 물량을 인수했다. 이 과정에서 오데마치펀드는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하지만 공동 투자한 일본 상사들은 현대차와 맺은 수익률 보장 약정에 따라 원리금을 챙겨 갔다. NCI는 2년 뒤인 2002년 말 청산됐다. 보유했던 지분은 2002년 집중적으로 장내에서 내다팔았다. 이 가운데 400만 주는 현대강관이 다시 사들였다. 매각대금 중 69만여 달러는 현대차 임원을 통해 정 회장의 개인금고로 흘러들어 갔다.

해외펀드는 인천제철 경영권 방어에도 동원됐다. 현대차는 3000만 달러를 들여 멜코와 굿 펠로우즈라는 해외펀드를 설립한 뒤 인천제철 주식을 사들이게 했다. 이 지분은 이후 계열사인 현대캐피탈과 기아차에 전량 매각돼 경영권을 강화하는 데 이용됐다.

◇현대차뿐인가=코스닥 상장사인 J사는 2005년 말레이시아에 적을 둔 한 펀드가 자사 지분 5% 이상을 매입해 주요 주주가 됐다고 공시했다. “투자 주체나 목적을 몰라 실체를 파악 중”이란 설명도 달았다. 외국인 투자 확대나 경영권 분쟁을 예상한 개인들이 주식을 사면서 주가는 단기간에 급등했다.

하지만 이 해외펀드의 대주주는 J사 대표와 가까운 사람이었다. ‘검은 머리 외국인’을 활용해 주가를 끌어올린 전형적인 사례다. 2002년 12월엔 검은 머리 외국인에 의해 증시 사상 최대의 미수사고가 터졌다. 홍콩의 한 투자자문사 대표인 지모씨가 삼성전자 등의 주식 1700억원어치에 대해 매수주문을 낸 뒤 대금을 내지 않고 사라진 것이다. 거래를 중개했던 국내 증권사들은 100억원이 넘는 손실을 입었다. 이후에도 코스닥 회사들을 대상으로 주가 조작을 일삼던 지씨는 한국과 홍콩 금융당국의 공조로 검찰에 고발됐다.

증권가에선 코스닥에서 외국인 투자 유치나 경영권 분쟁이 생기는 경우 검은 머리 외국인이 개입된 사례가 적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 해운사인 흥아해운은 2005년 페어먼트파트너라는 해외펀드가 1대주주로 올라서면서 인수합병(M&A) 논쟁의 대상이 됐다. 하지만 후에 펀드의 주인이 이 회사의 홍콩 대리점을 운영하는 한국인임이 밝혀졌다.

나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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