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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CUS] 조양호 한진 회장 단독 인터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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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호 18면

평소 ‘명품 항공사’를 입버릇처럼 외치던 조양호(58·사진) 한진그룹 회장은 6일 만감이 교차하는 듯했다. 이날 차세대 2층 항공기인 A380이 첫선을 보이면서 인천공항∼제주도까지 시험 비행을 했기 때문이다. 대한항공은 2010년부터 총 5대(대당 2400억∼2800억원)의 A380을 미국 LA와 뉴욕 노선 등에 투입할 예정이다. A380은 2층 객실에 최대 836명까지 탑승할 수 있는 초대형 항공기로, 넓은 공간에 미니바·라운지가 있어 ‘날아다니는 호텔’로 불린다.

“A380 납기 지연에 취소 않고 값 깎았죠”

이날 시승 행사에 참석했던 기자는 항공기 2층 좌석에 앉아있던 조 회장을 조용히 찾아가 “잠시 말씀 좀 나누고 싶다”고 하자 선뜻 비어있던 옆좌석에 앉도록 권했다. 덕분에 제주도를 회항해 인천공항에 다시 착륙할 때까지 단독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우선 A380 인도가 1년 반이나 미뤄진 것에 대해 에어버스 측에서 어떤 보상을 해주었는지 물었다. 2008년 인도하기로 했던 A380은 에어버스 측의 납기 지연으로 2010년에나 대한항공의 태극마크를 달 예정이다.

“납기가 1년 이상 지연될 경우, 구매 취소도 가능했어요. 하지만 우리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대신 적잖은 가격인하를 이끌어냈죠.” 하지만 그는 값을 얼마나 깎았는지에 대해선 “말할 수 없다”고 했다.

“노엘 포거드 에어버스 회장이 세 차례나 직접 납기 지연 이유를 설명했어요. 마지막엔 저를 만나러 날아오기까지 했죠. 해명은 명쾌했어요. 회사 경영상의 문제이지 제품은 여전히 훌륭했어요. 우리 역시 수차례에 걸쳐 100여 명의 엔지니어와 담당자를 현지 공장으로 보내 확인했어요.”

그는 “2010년에도 A380을 인도받지 못하면 그때 가서 또 보상을 받겠지만, 에어버스가 약속을 지킬 것을 확신한다”고 덧붙였다.

“우리보다 먼저 싱가포르항공이 처음으로 다음달께 A380을 띄워요. 이 항공사와 딱히 경쟁노선이 있는 건 아니지만, 앞서 A380을 선보이는 걸 의식하지 않을 순 없죠.”
조 회장은 2003년 한진그룹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엑설런스 인 플라이트(Excellence in flight)’를 슬로건으로 명품 항공사를 만들겠다고 선언한 뒤 최신 항공기 도입을 서둘렀다.

“요즘은 돈이 있어도 항공기를 들여오기가 여간 힘든 게 아녜요. 빌려오는 것도 마찬가지고. 계약하고 인도받는 데도 4~5년은 족히 걸립니다. 그래서 더 신중해야 해요.”
조 회장의 A380 시승은 이번이 세 번째다. 그는 항공정비 부문에서 5년 넘게 경력을 쌓은 데다 조종훈련까지 받았다. 조종사의 가벼운 실수도 눈치 챌 정도다.

에어버스 등 항공기 제작사들은 2001년 9·11테러로 주문량이 급감하자 경영난에 부닥쳤다. 조 회장은 이들의 위기를 항공기 도입의 호기로 활용했다. 2003년 초대형 항공기 A380 5대를 주문했고, 이어 2005년 보잉의 차세대 항공기 B787 10대를 도입하기로 했다. 지난해에는 보잉과 대한항공 사상 최대 규모인 25대(약 55억 달러)를 구매하는 계약도 체결했다. 보다 좋은 가격에 들여올 수 있는 이점도 활용했지만, 무엇보다 제품을 보고 결정했다. 조 회장은 품질 이외에 다른 변수는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고 못을 박았다. “계약 당사자가 아닌 다른 누구를 통해 로비가 들어오면 거래를 안 하는 것이 제 원칙입니다.”

조 회장이 외친 명품 항공사는 화물 쪽에서 먼저 이뤄졌다. 그가 그룹을 맡은 지 2년 만에 대한항공은 항공화물 수송 세계 1위에 등극하며 세계 물류역사에 획을 그었다. 3년째 1위 자리를 지키며 급기야 한국과 무관한 외국 간 항공화물 수송 비중이 더 커졌을 정도다.

화물은 말이 없다. 하지만 사람은 조금만 불편해도 불평한다. 신형 항공기 도입을 위한 과감한 투자 못지않게 서비스 품질을 높이기 위해 박차를 가하는 것도 이런 이유라고 그는 설명했다. 조 회장은 서비스 품질을 비교하고 벤치마킹하기 위해 일부러 다른 항공사를 이용한다고 했다.

“한번은 명품 항공사라고 소문난 항공사를 탄 적이 있는데, 좌석 팔걸이에 부착된 핸드 셋을 열어보니 관리가 전혀 안 돼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귀국하자마자 임원들에게 타산지석으로 삼자고 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쉽게 고쳐지는 사소한 문제가 늘 반복되는 것이 서비스 현장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런 조그만 문제가 명품 항공사로 가는 데 걸림돌이 된다는 것이다.
“깨진 유리창 같은 거죠. 아무리 훌륭한 건물도 유리창이 한두 장 깨진 채 방치하면 행인들 눈에는 주인도 없고, 관리도 안 되는 버려진 건물로 인식돼요. 너도나도 돌을 던져 남아나는 유리가 없게 되죠.”

조 회장은 매일 아침 전 세계 대한항공 노선에서 제기되는 승객 불만사항을 모니터링한다.

“제가 보고 있는 걸 아니까 지점장들이 행여 관할노선에서 불만이 나올까 노심초사한다고 합니다. 실수는 물론 반성하고 고쳐야지요. 하지만 고객에게 사과만 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경우도 많습니다. 무조건 친절하다고 서비스 품질이 좋아지는 건 아닙니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이기적인 승객이 있다고 합시다. 서비스 품질의 기준을 그 승객에게 맞출 순 없지요. 보다 많은 승객을 위한 원칙을 가져야 합니다.”

승객이 불평한다고 아무 기준도 없이 직원만 문책하지는 않겠다는 뜻이다. 항공사를 명품으로 만들려면 무엇보다 승객의 ‘안전’과 ‘편안함’을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승무원 유니폼 교체 때도 그는 원칙을 강조했다고 했다.

“제가 디자인을 뭐 압니까?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 것이 아니라 ‘밖에서 보는’ 우리 것으로 해야 한다는 원칙은 있었습니다.” 이탈리아 디자이너인 지안프랑코 페레를 기용한 것도 그래서다. 해외 디자이너에게 맡겨 우리 것에 대한 객관적인 안목을 살려보자 생각했다.

“페레 디자인팀이 제대로 짚어낸 것 같아요. 방한해서 민속촌이며 박물관을 답사하더니 그들의 시선으로 한국적인 미를 찾아내더군요.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바로 ‘청자 색’이죠. 여러 분을 초청해 품평을 받았는데 한국의 미를 현대적으로 잘 살렸다며 반응이 좋았어요.”

조 회장은 “조직의 변화란 결국 관점을 바꾸는 것”이라고 했다. 이른바 ‘앵글 경영론’이다. 그가 사진에 심취하는 이유도 바로 앵글을 바꾸어가며 변화를 즐기기 위해서다. 해외에 나갈 때마다 틈을 내 작품활동을 하는 조 회장은 연말이면 좋은 사진을 골라 달력을 만들어 지인들에게 선물하는 수준급이다. 이번 시승 때는 캠코더를 들고 탔다.

“파리에 갔을 때 에펠탑을 찍었는데 ‘평화의 벽(The Wall for Peace)’ 속에 에펠탑이 들어있는 사진을 보고, 다들 ‘이런 게 정말 있느냐’고 묻더군요. 벽 사이로 에펠탑을 보고 찍으면 그런 모습이 나옵니다. 보는 각도를 조금만 바꿔도 전혀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수 있는 거죠.”

조 회장은 높이 올라온 만큼 더 멀리 내다보는 경영이 필요하다고 했다. 경쟁사보다 앞서 신규 항공기 도입을 추진한 것이나 항공사 동맹체인 ‘스카이팀’을 주도적으로 결성한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올 초에는 한진에너지를 설립해 에쓰오일의 2대주주가 되면서 ‘물류의 혈액’인 유류를 안정적으로 공급받는 기반을 다졌다.

조 회장이 풀어야 할 숙제도 없지 않다. 추진중인 저가항공사 설립을 두고 일각에선 “품질과 저가를 병행할 수 있을지 의문”이란 의견도있다. 초대형 A380도 승객이 줄어드는 비수기엔 오히려 효율이 떨어질 수도 있다. 게다가 대한항공이 속해 있는 스카이팀도 아직은 네트워크나 규모에서 경쟁 얼라이언스에 뒤진다는 평가다. 인터뷰가 끝날 즈음 A380은 안전하게 인천공항에 착륙했다. 점심 식사 후 조 회장은 2차 비행을 위해 다시 이륙했다. 그의 꿈은 2010년 세계 10대 명품 항공사로 비상하는 것이다. “참, 한 가지 빠뜨린 말이 있는데. 아까 사진을 왜 찍느냐고 했죠? 남들이 가보지 못한 곳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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