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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책갈피] 타박타박 … 길 위에서 만난 조선의 얼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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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조선시대에 먼 길을 떠나기 전 해야할 중요한 일은 말굽 확인 등 말을 꼼꼼히 점검하는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조영석 그림<말 징박기>.

역사, 길을 품다
최기숙 외 지음, 글항아리
366쪽, 1만6000원

 1872년 5월30일 밤 평안도 후창군의 압록강변. 조선의 장교 세 사람이 떨리는 가슴을 안고 몰래 강을 건넜다. 수시로 건너와 무단 벌목을 일삼았던 무장 청인들이 사는 압록강 이북을 정탐해 변방의 안정을 꾀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그들의 외지 탐사는 스파이극에서 금세 ‘로드 무비’로 흐른다. 길지(吉地)라는 말에 현혹돼 국경을 넘어 고단한 ‘이민 생활’을 하는 조선 동포를 만나 위로하기도 한다. 이주한 지 오래돼 복장과 풍속이 모두 오랑캐 식으로 변한 조선인을 보고 혀를 차기도 한다. 무산부사 마행일이 가혹하게 조세를 쥐어짜는 바람에 주민들이 집단 월경해 만주에 사는 걸 보고 안타까워 한다. 하지만, 관청 기록을 보면 마행일은 대원군의 심복으로 못 받았던 세금을 거둬 재정을 확보한 인물로 칭송을 받았다고 한다. 같은 사안을 놓고도 조정과 백성이 보는 눈은 왜 이리도 다른지.

 조선시대 기록인 『강북일기』를 바탕으로 정리한 조선조의 한 풍경이다. 그 누구도 그들보다 먼저 간 이가 없기에 다소 어수룩하기도 하고, 겁도 많았지만 임무를 달성하기 위해 외지를 누비는 조선 무사들의 호흡이 느껴지고, 당시의 풍경이 눈앞에 그림처럼 펼쳐져 자못 흥미롭다.

 이 책은 이런 식으로 ‘길’을 화두로 삼아 조선시대 우리네 조상의 삶을 생동감 넘치게 재구성하고 있다. 당시 풍경을 바탕으로 한국·한국인의 근원을 살펴보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그것도 인간의 살 냄새가 물씬 풍겨나는 생활의 한복판에서 말이다. 10명의 한국학 관련 교수가 각각 첩보·장례·상소·유배·휴가·장사 등을 위래 떠난 길의 기록을 나눠 맡았다.

 

‘상소길’ 편을 보면 그야말로 흥미진진한 한 편의 영화 소재다. 서원을 철폐하라는 나라의 명이 떨어지자 유생들은 부당함을 호소하기 위해 길을 떠나 조정에 상소를 전달하기로 한다. 이를 위해 사발통문을 돌려 사람을 모으고, 수많은 의견을 하나로 통일하는 작업을 거친다. 하지만, 이게 어디 쉬운 일이랴. 발을 빼는 자, 눈치를 보는 자, 변명을 늘어놓는 자…. 다양한 인간의 모습이 웬만한 드라마 못지 않다. 재미난 것은 집권세력과 정면대결을 피하려면 상소도 교섭을 해서 전달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교섭비도 쏠쏠히 들어갔다는 사실이다. ‘요양길’은 75세의 노유학자 정구 선생이 대구의 도동서원에서 동래 온천으로 요양을 떠나는 길을 그렸다. 조선시대 왕이 아닌 민간인의 요양을 다룬 자료라는 점에서 신선하다. 사진, 그림 심지어 자세한 설명을 곁들인 지도를 담아 읽는 이의 시간 여행을 편하게 한다.

조선시대에 먼 길을 떠나기 전 해야할 중요한 일은 말굽 확인 등 말을 꼼꼼히 점검하는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조영석 그림<말 징박기>.

채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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