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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보 연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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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사랑을 쓰려거든 연필로 쓰세요~. 쓰다가 쓰다가 틀리면 지우개로 깨끗이 지워야 하니까/ 처음부터 너무 진한 잉크로 사랑을 쓴다면 지우기가 너무 너무 어렵잖아요.”

1980년대 전영록의 히트곡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의 가사다. 공감하면서 입 속에서 흥얼거렸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이 노래 가사를 무색하게 한 곳이 바로 일본의 ‘돈보(TOMBOW·잠자리) 연필’이다. 연필을 써 본 세대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들었을 이름일 게다. 수정액으로 지운 뒤 한참 기다렸다 다시 써야 했던 불편함을 돈보의 ‘수정 테이프’는 단숨에 해결했다. 옆으로 쫙 긁는 것만으로 잉크건 사인펜이건 잘못된 곳을 금방 말끔하게 고칠 수 있었다. 돈보는 90년대 초까지 버블 붕괴의 여파에다 연필 수요의 감소로 100억 엔이 넘는 부채를 떠안고 있었다. 그러나 이 상품의 대박으로 단숨에 흑자로 전환했다.

돈보의 창업은 1913년. 창업자인 오가와 하루노스케는 회사를 차린 뒤 “뭔가 특별한 상표가 있어야겠다”고 생각, 특허사무실을 찾아갔다. 사내에서는 공장이나 교각 디자인을 주장했지만 오가와는 잠자리를 택했다. 잠자리는 전진만 했지 후진을 못한다. 그래서 일본에선 용맹한 무사의 상징이다. 무사들 갑옷도 잠자리 장식 일색이다. 게다가 잠자리를 일컫는 옛 표기는 ‘아키쓰(秋津)’. 일본의 옛 지명이었던 ‘아키쓰(秋津)섬’과 통했다. 여러모로 길하게 느껴졌음 직하다.

다만 오가와는 제품에 잠자리 무늬를 넣고 회사 이름을 ‘돈보’로 바꾸면서 한가지 변형을 했다. 잠자리의 머리를 잔뜩 숙였다. 고객에게 깊게 머리를 숙이는 상인의 자세를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최근 창업자 하루노스케의 손자인 요헤이(60) 회장이 마약을 복용하다 구속됐다. 바로 ‘수정 테이프’를 개발해 냈던 주인공이다. 4년 전 대표이사 사장 자리를 사촌(54)에게 물려주고 대표권이 없는 회장 자리로 물러선 직후 마약에 손을 댔다. “사장직에서 물러나자마자 아무것도 할 게 없어졌다. 사람들도 다 떠나고 결국 마누라까지 떠나자 형언할 수 없는 고독을 느꼈다”며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맞다. 잠자리는 전진만 한다지만 인생에는 전진 말고 후진도 필요한 게다. 잠자리 머리만 숙일 게 아니라 스스로 머리를 숙이는 연습도 해야 했다. “아~, ‘행복했던 돈보’여 어디로, 너는 어디로 날아가느냐.” 88년 일본 가수 나가부치 쓰요시의 히트곡 ‘돈보’의 가사가 맴맴 떠돈다.

김현기 도쿄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