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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문학·영화, 경계를 가로지르는 저술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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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호 08면

1. ‘방송사고’로 맺은 인연
한 2년 전에, 팔자에도 없이 매주 방송국을 들락날락한 적이 있다. 8개월 동안 텔레비전의 책 소개 프로 진행자를 맡았던 것인데,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그것이 ‘방송사고’였다고 생각하고 있다. 아무래도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저런 욕심 때문에 덜컥 출연을 수락해 놓고서는, 방송을 마치는 날까지 마음고생이 심했다. 그 일은 독서를 좋아하고 책을 조금 읽었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방송인’이 해야 하는 거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 일이 고난만 안겨준 건 아니었다. 매주 새로운 책을 읽고 저자와 토론자들을 만나는 즐거움이 있었다. 최근 『설득의 논리학』(웅진지식하우스, 2007)으로 독자들의 호응을 얻고 있는 김용규 선생을 처음 만난 것도 그 프로에서였다. 저자는 막 발표한 두 번째 소설 『다니』의 저자로 출연했는데, 그 작품을 읽었던 소감을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고목나무에서 새순이 돋는 것과 같았다고 할까.

장정일이 만난 작가-김용규

2. 고목나무 같던 문학에 새순이 돋다
최근에 벌어지고 있는 ‘문학의 종언’ 논쟁은 문학의 사회적 의제 설정 능력이 점차 약해지는 것과 연관되어 있는데, 『다니』는 ‘문학의 종언’이 운위될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를 짚어준다. 현대에 들어서면서 자연과학이나 기술은 하루가 다르게 바뀌고 있는데도, 문학은 그런 발전이나 발견에는 태무심했다는 것. 다시 말해 새로운 과학과 기술은 항상 시대의 첨단을 선점하면서, 전통적인 삶의 양식과 윤리에 문제를 제기한다. 그런데 문학은 자연과학이나 기술의 반대편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그 성과를 반영하는 일에 게을렀다. 그러므로 ‘문학의 종언’이 도래했다는 말은 문학의 탈정치적 경향만 협소하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반과학적인 태도와도 상관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기적 유전자’ 논쟁이나 유전자 복제 기술은 과학적 발견이면서 우리가 맞닥뜨려야 할 광범위한 사회적 문제며, 충분히 소설적 ‘꺼리’가 된다. 나는 그 새로운 각오를, 고목(오래된 문학)에 새순(과학과의 조우)이 돋는 것이라고 느꼈다.

냉철하고 뜨거웠던 소설 『다니』는 20세기 전체를 물들인 숱한 제노사이드(Genocide: 집단학살)에 바쳐진 만가이자, 생물학적 결정론을 사회적으로 악용한 무리들에게 보내는 고발장이다. 뒤늦게지만 방송이란 인연을 통해서 저자를 알게 되면서, 2001년에 출간했던 첫 번째 소설 『알도와 떠도는 사원』(웅진지식하우스)이 나만 모르고 있었던 대단한 화제작이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지식 소설 또는 판타지 소설로 선전되어온 이 책은 몇 년간 절판 상태로 있다가 지난해 출판사를 옮겨 재간되었는데, 나는 단숨에 그 소설을 읽어치우고 약간 긴 독후감을 써서 우편으로 보냈다.
“소설을 쓰겠다는 생각은 애초에 없었습니다. 유학을 마치고 92년에 귀국을 해서 모 신학대학교에 강의를 나가기도 했지만 여의치 않아 아내 대신 ‘전업주부’ 노릇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96년경에 우연히 논술학원의 교사들을 재교육하는 강사가 되었고, 그 세계에 있다 보니 주변의 부탁으로 고등학생들의 그룹과외까지 하게 되었죠. 마침 그때가 판타지 소설이 유행할 때였고 학생들이 그걸 재미있게 읽고 있기에, 매주 한 꼭지씩 제가 강의해야 할 내용에다 ‘판타지’라는 당의정을 입혀 강의 자료로 썼습니다. 그 강의록이 모여서 『알도와 떠도는 사원』이 된 거죠. 그 소설의 모티프이자 플롯을 지탱하는 인공지능 이야기는, 유학 시절 튀빙겐 대학에서 논리학을 공부하면서 인공지능을 연구하는 과학자들과 공동 연구를 했던 경험이 바탕이 됐죠.”

3. 영화로 철학을 사유하다
『알도와 떠도는 사원』을 시작으로 저자는 심심치 않게 책을 냈는데 양보다는 장르의 다양함이 더 도드라진다. 앞에 소개했던 두 권이 소설이라면 『영화관 옆 철학카페』(이론과 실천, 2002), 『데칼로그』(바다출판사, 2002), 『타르코프스키는 이렇게 말했다』(이론과 실천, 2004)는 표면상 영화에 관한 책으로 분류된다. 나는 이 책들을 보면서 영화를 인문학 텍스트로 대접하는 유럽에서의 경험이 저자로 하여금 이런 책을 쓰게 만든 게 아닌가라는 생각도 했지만, 저자의 대답은 전혀 의외였다. “제가 이 책들을 쓰기 전에 아는 영화라곤 ‘록키’ 같은 영화였습니다. 타르콥스키라는 이름을 안 것은 한국에 귀국해서였죠. 누군가가 타르콥스키라는 대단한 감독이 있다면서 보기를 권하기에 비디오를 빌려서 가족들끼리 둘러앉았는데, 딸은 5분 만에 잠들고 아내는 10분 만에 잠들었습니다. 저는 15분마다 한 번씩 졸았고요. 주변의 상상과 달리 아주 가리늦게 소위 예술영화를 발견하게 되었지만, 다행히도 영화와 철학의 상관성을 곧 포착하게 되었습니다.” 저자에 따르면 고대로부터 철학에 주어진 주요 업무는, 인간의 삶과 세계의 다양성 속에서 또한 영속하는 시간 속에서 부단히 명멸(明滅)하는 환영들을 관통하며 불변하는 ‘그 어떤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플라톤의 용어로 말하자면 불완전한 인간으로 하여금 ‘이데아를 상기하게 하는 것’이 바로 철학이다. 그런데 저자가 한 권씩의 연구서를 바친 타르콥스키나 키에슬로프스키 같은 감독들의 영화는 단순히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숱한 환영 속에서 불변하는 이데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철학과 같다는 것이다. 편의상 이 책들은 영화 관련서로 분류되지만 실제로는 영화를 텍스트로 한 철학서이며, 특히 키에슬로프스키의 ‘십계’ 연작을 텍스트 삼아 쓴 『데칼로그』는 ‘십계명’에 관한 심도 높은 연구서로 회자되고 있다.

4. 진짜 논술은 철학적 훈련의 바탕
세 번째 집필 장르는, 중학교 저학년을 위한 기초적인 철학입문서들과 고전읽기를 통해 중·고등학생들에게 책을 읽고 사유하는 방법들을 길러주는 책들이다. 총 8권으로 기획되어 있으면서 현재 4권까지 나온 『철학통조림』(주니어김영사)이 전자에 속하고,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웅진지식하우스, 2006)와 이 글의 첫머리에 거론한 『설득의 논리학』은 후자다. 저자는 그저 돈 때문에 ‘논술 시장’을 겨냥해서 쓴 거라고 손사래를 치면서, 자신은 철학 이론을 대중화하는 ‘철학 장사꾼’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철학은 ‘꼼꼼히 따져보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걸 비판정신이라고 하는데, 논술의 본래 취지는 학생들에게 책을 읽히고, 글을 쓰게 하고, 합리적 비판 사고를 키워주는 것입니다. 거기서 얻어지는 비판적 사고의 향상이 논술의 목적이죠. 논술고사는 고전의 제시문을 놓고 오늘의 삶이나 사회와 연관을 지어보고 자신의 생각을 개진해보라는 거라서, 철학시험이나 마찬가집니다. 그런데 고3은 수능에 집중해야 하기 때문에 수능이 끝나고 5주라는 짧은 기간 동안 방대한 고전을 읽고 논술을 준비해야 합니다. 불가능한 일이죠. 그런데 그런 무리는 ‘입시논술’이란 특수한 상황에서 오는 거지, 논술이라는 큰 틀에서 보면 ‘입시논술’의 폐해는 아주 작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시키지 않으면 아무도 고전을 읽지 않게 되죠.”
논술이 곧 철학은 아니지만, 논술 교육의 방법론은 철학적 훈련의 바탕이 된다는 말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나라 지성계가 늘 부러워하는 유럽의 중·고등학교 철학 교육(과목)에 대해 물어보았다.
“중·고등학교에 철학과목을 만드느니 논술을 정규과목으로 하는 게 훨씬 낫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철학은 교양이 아니라 아주 전문적인 지식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교육 상황으로 볼 때, 중·고등학교에 철학과목이 들어오면 철학개론이나 철학사를 가르치고 말 확률이 높습니다. 차라리 논술과목을 정규화해서 읽고, 쓰고, 토론하는 훈련을 시키는 게 낫죠. 각 대학교 철학과 안에 논술교과를 넣어서 그것을 이수하는 학생들에게 논술교사 자격증을 주는 방법도 생각해봐야 하고요.”
‘철학자’라는 명칭은 철학 연구를 하지 않는 자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면서, 저자는 ‘자유저술가’로 불리길 원한다. 오래전부터 “남도 쓸 수 있는데 나도 쓸 수 있는 게 아닌, 내가 더 잘 쓸 수 있고 나만이 쓸 수 있는” 방대한 주저(主著)를 구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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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을 가공하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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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규씨는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과 튀빙겐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한국에서 철학을 전공했던 그는, 철학 전공자는 반드시 부전공을 택해야 하는 독일의 특성과 더불어 4대째 기독교를 믿어온 집안 배경 때문에 신학을 함께 공부하게 됐다. 개인적인 사정도 있었다. “1988년에 독일에서 교통사고가 났다. 아우토반은 속도제한이 없기 때문에 대형 사고였는데, 누구나 그렇겠지만, 그런 큰일을 겪고 나면 신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가 언젠가 쓰고 싶은 저서도 철학과 신학이 한데 있는 책이라고 한다.
그러나 김용규씨는 오랜 시간 철학을 공부해 왔는데도 ‘철학자’로 불리는 것을 다소 민망하게 생각한다. “공식적인 직함이 없다 보니 나를 소개할 말이 마땅치 않아 철학자라고 소개하곤 하는데,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단어다. 철학자는 철학 연구를 계속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나는 철학을 재가공해서 대중에게 알리는 사람이고.” 그 말처럼 김용규씨는 강의도 하고 책도 쓰지만 직함은 없다. 작지만 꽃과 풀이 무성한 정원이 있는 집에서 아침부터 밤까지 열심히 일을 하는 그에겐 인터넷 선도 없다. 그가 차분하고 느린 말투로 오래 삭힌 것처럼 깊이 있는 식견을 들려줄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사소한 사물이나 현상에서도 그 이면을 발견하여 달변을 풀어놓는 김용규씨는 『데칼로그』 『영화관 옆 철학카페』 등에 그 깊고도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담아두었다. 글 김현정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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