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과 행정규제(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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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물리학을 전공하는 김 교수는 미국 캘리포니아공대 교수의 초청을 받고 1년간 초빙교수를 지내다 돌아왔다. 그가 초청받아 미국으로 갈 때는 단 한장의 이력서에 수락한다는 서명을 한게 사무적으로 치른 일의 전부였다. 그런데 그가 귀국한 다음 대학에 미국 교수를 초청할 기회가 있어 일을 추진하다보니 도대체 찍어야할 도장이 얼마인지,거쳐야할 관청이 몇곳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적어도 학과의 필요에 따라 외국교수를 초청하기로 대학이 결정했으면 그것으로 끝날 일이지 교육부에서는 이 서류가 필요하다,저 확인이 필요하다해서 나중엔 초청 자체를 포기해 버릴 정도로 짜증이 나버렸다고 한다.
사실 대학의 자율이란 별것 아니다. 대학이 자율적으로 결정한 일을 정부가 틀어쥐고 이래라 저래라 하니 자율권 침해가 된다. 막상 해야 할 대학에 대한 정부의 재정지원같은 큰 일은 제대로 못하면서 불필요한 행정규제로 지식인의 실낱같은 자존심을 건드리며 군림하고 행세하려드는게 관리들의 대학에 대한 행정규제라는 것이다.
그저께 있은 대학 총장회의에서도 교육부장관을 앞에 두고 많은 총장들이 불평을 터뜨렸다. 한분 총장이 포문을 열었다. 교수들의 강의부담을 줄이고 연구의욕을 북돋우기 위해 유사학과를 통폐합한다는 학부제를 추진했다.
학생들과 교수들을 어렵게 설득하고 성사시켜놓고 보니 학부제는 규정에 없는 것이라고 교육부가 요지부동 반대만 하고 있다고 한다. 교육부가 할 일을 대학이 자율로 해놓았는데도 정부가 걸림돌이 되어 반대하고 있으니 말이나 되는 소리냐는 항변이다.
또다른 총장이 열을 올렸다. 다음 학기에 중문과 학년 전원을 1학기동안 중국 남경대에 보내 수업을 받게 할 계획이나 정부규제 때문에 실현 가능한지 한숨만 나온다고 했다. 행정규제가 이처럼 까다로우니 외국인을 교수로 채용할 수 없는 나라가 지구상에 우리나라 밖에 없다고 했다. 대학이 대학 돈으로 외국교수를 모셔오겠다는데 어째서 교육부가 감놔라 대추놔라 하느냐고 분통을 터뜨리는 총장도 있었다. 말이 세계화·국제화지 이를 막는게 바로 정부고 교육부라는 것이다.
허울좋은 대학자율화만 떠들게 아니다. 불필요한 작은 행정규제를 정부 스스로 풀어가면서 대학의 자율과 국제적 경쟁력을 높이는 노력을 함께 보이는게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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