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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프라임 사태가 국내 부동산 시장까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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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호 24면

일러스트=강일구

서울 마포구에 사는 성모(57)씨는 최근 노후대비용으로 아파트 한 채를 더 사려던 계획을 미뤘다. 성씨는 당초 몇 년 뒤 재건축이 가능해지는 상암동 월드컵경기장 부근의 82.645㎡(25평형) 아파트를 전세를 끼고 구입할 계획이었다. 전세자금 1억3000만원을 빼면 4억5000만원짜리 아파트를 사는 데 3억2000만원이 필요했다. 여유자금 2억원을 투입하고 나머지는 대출을 받기로 했다. 하지만 미국 서브프라임 사태가 터지면서 불확실성이 커졌다. 금리가 오르는 가운데 중개업소에선 매수 희망자들이 하나 둘씩 빠져나가고 있다고 했다. 성씨는 연말까지 시장을 지켜볼 생각이다.

“美 집값 10% 떨어지면 한국은 1.6% 내리는 정도”

미국 서브프라임 사태의 본질은 주택시장 침체다. 따라서 미 서브프라임 사태로 인한 연쇄 파장으로 우리도 주택시장의 침체로 이어지지 않을까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박원갑 스피드뱅크 연구소장은 “가격이 크게 떨어지거나 매물이 쏟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며 “미국 부동산 시장이 국내 부동산과 직접 연결돼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부동산 관련 부실대출이 금융권 전체의 위기로 이어질 위험도 거의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하지만 서브프라임 사태가 마무리가 아니라 시작이라는 점은 안심할 수 없는 대목이다. 미국 가계부실이 현실로 나타나면 소비가 줄고 수출 등 국내 경기가 위축돼 부동산 시장의 타격이 불가피하다. 증시에서의 외국인 매도 등으로 신용경색이 심화하면 현금 확보를 위해 매물로 쏟아질 집이 늘어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아직까진 ‘강 건너 불’=서브프라임 사태는 국내 부동산 시장에 ‘강 건너 불’이다. 미국 집값과 한국 집값 사이에 연결고리가 없기 때문이다. 고준석 신한은행 부동산팀장은 “파장이 세계적으로 동시에 퍼지는 금융과 달리 집값은 정책과 경기 등 국내 변수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는다”며 “미국 집값이 떨어진다고 해서 한국 집값이 똑같이 움직일 이유가 없다”고 지적했다. 실제 미국의 집값은 상반기에 평균 5%가량 떨어진 것으로 추정되지만 서울 아파트는 같은 기간 중 평균 2.2% 상승했다. 주택담보대출 연체율도 사상 최저 수준이다. 현재 은행권의 주택담보대출 연체율은 1%가 채 안 된다. 국민은행이 상반기에 0.8%, 신한은행 0.5%, 우리은행은 0.6% 정도다. 미국의 서브프라임 업체와 비교되는 저축은행의 연체율도 평균 9% 안팎으로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연체율(19%)을 크게 밑돌고 있다.

부동산 시장 하락에 따른 금융권 전체의 연쇄 부실도 우리와는 먼 얘기다. 미국은 서브프라임 대출의 70%가량이 자산담보부증권(ABS) 등으로 발행됐고, 이를 사들인 투자은행들이 거액의 손실을 입었다. 하지만 국내에선 부동산대출이 유동화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일부 대출이 채무불이행 상태에 빠져도 돈을 빌려준 저축은행이나 은행만 손실을 보게 된다.

■규제가 약 됐다=미국의 서브프라임 사태는 상환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과도하게 많은 대출을 내준 데서 발생했다. 집값의 85∼90%, 심지어 100% 이상을 빌려주다 보니 집값이 조금만 하락해도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일부 금융사는 대출 희망자의 소득이나 신용도를 부풀려 상환능력이 있는 것처럼 꾸미기도 했다.

한국의 부동산 대출은 이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정부는 최근 몇 년간 부동산 경기 과열을 막기 위해 잇따라 강력한 규제책을 내놓았다. 시가 6억원 이상 주택에 대한 종합부동산세 도입, 양도세 중과, 담보비율(LTV) 하향 조정 등이 대표적이다. 다음달부턴 무주택자와 다자녀 가구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청약 가점제와, 가족 중 한 사람이라도 아파트에 당첨되면 전 가족이 최장 10년간 청약을 못하는 재당첨 금지제도가 실시된다. 이들 조치는 도입 당시 ‘과도한 시장개입’이란 비판을 받았지만 투기적 수요를 억제하고 부실대출을 예방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박원갑 스피드뱅크 연구소장은 “국내 주택대출 대부분이 집값의 40∼60% 수준이어서 집주인이 빚을 못 갚아도 금융회사가 타격을 받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며 “강력한 금융규제가 오히려 약이 되고 있는 형국”이라고 말했다.

■실물경기 간접 충격이 변수=그렇다고 마냥 안심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다. 금융과 실물 경기를 통해 서브프라임 사태가 간접적인 악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소득보다 지출이 많은 미국 가계가 그동안 꾸준히 소비를 늘릴 수 있었던 데엔 집값 상승이 큰 몫을 했다. 자산가치 상승에 따른 ‘부의 효과(Wealth Effect)’ 때문이다. 미국 가계는 오른 집값을 근거로 더 많은 대출을 받고, 낮은 금리로 대출을 갈아타며 자동차와 가전제품을 사들였다. 하지만 부동산 경기 위축으로 이 흐름이 끊기면 미국 내수가 위축된다. 한국의 수출이 감소하고 경기가 침체하면서 집값이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금리 상승은 더 큰 위협이다. 주택담보대출의 기준인 양도성예금증서(CD) 금리는 보름새 0.16%포인트 급등했다. 지난달 말 현재 은행권 주택담보대출(217조9000억원)의 93.8%인 변동금리 대출을 받은 사람들의 이자 부담이 3000억원 가까이 늘어났다. 최근 1년간 금리가 최고 1%포인트 오르며 가계의 상환부담이 2조원가량 늘어났다는 게 금융권의 분석이다. 반드시 집을 파는 것을 조건으로 대출을 받은 처분담보부 대출 물량이 4만6000채에 달한다는 점도 불안요인이다.

경제정책 동조화에 따른 영향을 우려하는 시각도 있다. 금융시장의 세계화로 경기·물가뿐만 아니라 주식·채권 가격, 주택담보대출제도 등 집값에 영향을 주는 요인이 비슷하게 움직이면서 국내 집값이 서브프라임 사태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신후식 국회 예산기획처 거시경제분석팀장은 “영국·호주·뉴질랜드·한국의 부동산 시장이 미국과의 상관도가 비교적 높다”며 “미국 부동산 가격이 10% 하락하면 국내 부동산은 1.6% 정도 떨어지는 것으로 분석됐다”고 지적했다. 강종만 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정부가 주택금융공사 모기지 등 다양한 지원책을 펴고 있는 실수요자 중심의 중저가 주택은 큰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라며 “투기적 수요가 많은 고가 주택은 종합부동산세와 투자심리 악화로 상당한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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