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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북한 이홍구칼럼

국내·국제·남북관계의 3차 방정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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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유난스러운 폭우와 무더위에 시달렸던 우리 국민은 지난 한 달 동안 세 가지 큰 뉴스에 짓눌려 왔다. 첫째로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과 여권의 이합집산 등 대선정국의 혼란이 연일 시끄러움을 더해가며 불쾌지수를 높여줬다. 둘째,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인질 사태는 걱정과 안타까움만 더해갈 뿐 속수무책인 듯싶어 집단적 무력감마저 느끼게 했다. 셋째, 확실한 의제도 결정되지 않은 채 남북 정상회담이 평양에서 열린다는 발표에 이어 엊그제 나온 회담 연기 소식에 국민은 헷갈릴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어지럽게 돌아가는 국내외 사태를 접할 때마다 우리는 객관적이고 종합적인 분석보다 각개의 사건에 대한 과도한 흥분이 본말을 전도하는 경향마저 보여 왔다. 이제는 국내정치·국제체제·남북관계 등 세 차원에서의 전환의 위기가 지닌 성격이 무엇인가를 정확히 진단하고 종합적 국가전략을 모색할 수 있는 3차 방정식적인 사고의 틀을 활용해 나가야 할 시점이다.

오늘의 한국은 국민적 합의를 조성하고, 그를 바탕으로 선진화 전략을 추진해야 하는 중대한 고비에서 머뭇거리고 있다. 산업화와 민주화에 성공했지만 그 후에는 어디로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에 대한 비전·전략·리더십·국민적 합의의 부재라는 위기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정치제도와 문화는 소수를 대표하는 대통령에게 전권을 위임하는 ‘대통령 무책임제’의 한계를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87년 체제의 출범 이후 36.7%의 득표로 당선한 노태우 대통령, 3당 합당으로 권좌에 오른 김영삼 대통령, DJP연합으로 청와대의 주인이 된 김대중 대통령, 당선 직후 본인이 후보였던 여당을 탈당하고 20%내외의 지지도를 겨우 유지하고 있는 노무현 대통령 등 사실상 소수를 대표하는 대통령들이 국가를 경영해 왔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대외적으로 우리 국민의 민주주의 성숙도를 보여줬다는 측면이 있으나 역사적 전환기의 능률적인 민주국가 운영을 위해서는 개선돼야 할 과제임에 틀림없다.

오늘의 세계는 동서냉전의 종결로 비롯된 미국의 초강대국 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다원화를 향한 새 국제질서의 모색을 둘러싼 불안정과 혼란을 경험하고 있다. 전통적인 지정학적 세력균형, 세계화된 시장경제 차원에서의 경쟁 판도, 문명 간의 충돌이란 측면을 외면할 수 없는 중동사태 등의 본질적 성격 변화는 모든 국가에 새로운 생존전략의 모색을 피할 수 없는 과제로 만들어 놓았다. 분단의 어려움 속에서 세계 13위의 경제를 이룩한 것은 우리의 자랑이지만 과연 이에 걸맞은 대외적 관심을 갖고 국제사회에 참여해 왔는지 전혀 자신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형편이다. 이번 아프가니스탄 인질 사태를 겪으면서 중동 및 이슬람권에 대한 우리의 관심과 이해가 얼마나 제한적이고 안이했는가를 새삼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10월 초로 미뤄진 정상회담이 상징하는 남북관계의 어려움은 ‘불균형의 위기’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해가 갈수록 남북 간에는 여러 분야에서 불균형과 격차가 심해져 왔다. 그만큼 민족공동체 건설을 향한 미래는 불투명해졌고 통일비용도 커져가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북의 핵무기 개발을 통한 새로운 불균형 창출의 시도는 통일 전망을 한층 어둡게 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개방과 폐쇄로 대조되는 남북 간의 불균형이 위기의 근원이란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의 만남이기에 남북 상호 간의 기본예의는 지켜가되, ‘민족’을 내세우는 불필요한 이념적 수사에 의지하기보다는 북한이 세계사와 민족사의 큰 흐름에 맞춰 과감한 방향전환을 시도할 수 있도록 함께 고민하는 자리가 돼야 한다.

한국사회는 국내·국제·남북 문제 등 모든 차원에서 인간의 자유와 복지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관 위에 서있는 공동체다. 그 원칙에 충실한 민주국가로 발전시키고, 모든 동포가 함께 잘살 수 있는 민족공동체 건설을 위해 노력하며, 인류공동의 운명을 담보하는 전 지구적 노력에 적극 참여한다는 국민적 합의를 새롭게 다질 때다. 인류의 대행진에 우리도 앞줄에서 걸어가야 하지 않겠는가.

이홍구 전 총리, 본사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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