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위 아쉬운 여야대변인 「입」(취재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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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여야 대표들은 국회연설에서 21세기에 대비하려면 무엇보다 정치가 달라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민자당의 김종필대표는 『정치가 언제까지 시대 흐름을 외면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며 『우선 도덕적이고 건강한 정치로 국민의 신뢰를 반드시 회복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민주당의 이기택대표도 『정치의 질을 높이고 국회가 정치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옳은 인식이며 좋은 얘기다. 그러나 두 대표가 외친대로 정치권이 과연 탈바꿈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동안 정치권의 언행이 늘 불일치한데다 두 대표 연설후 나타난 양당 대변인의 수준이 아주 저급이기 때문이다.
우선 민주당 박지원대변인은 17일 김 대표의 연설에 대해 『실권없는 집권당 대표로서 온갖 정치적 수사를 사용한 연설이 얼마나 국정에 반영될는지 의심스럽다』고 무시했다. 그는 또 『김 대표가 대통령에 대한 바람막이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으며 구시대의 발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매몰차게 몰아붙였다.
민자당 하순봉대변인도 상대당 대표의 연설을 폄하·격하하는데 결코 뒤지지 않았다. 그는 18일 이 대표의 연설에 대해 『무책임한 선동과 구호만 나열한 것으로 제도권정당 대표의 연설로서는 가장 허구에 찬 실망스러운 내용』이라는 매우 몰강스러운 논평을 냈다.
그는 한술 더떠 『이 대표가 김일성을 만나겠다고 했는데 민족분단의 실상·고통을 알고나 하는 소린지 그의 수준과 상식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가장개혁을 외면한채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집단과 정치인은 바로 민주당과 이 대표』라고 욕설에 가까운 언사를 퍼부었다. 하 대변인은 그것도 모자란다고 생각했던지 이날 오후 『이 대표가 은행 흑자와 관련한 통계수치도 잘 모르고 마구잡이식의 연설을 했다』고 비난했다.
이에 박 대변인은 곧 바로 『시시콜콜한 사안을 가지고 야당비판이나 일삼는 정당은 천상천하에 민자당뿐』이라는 논평으로 반격한데 이어 19일에는 『민자당이 자꾸 꼬투리잡아 인신공격한다면 우리는 매일 민자당 총재와 그 자제에 대한 논평을 내겠다』고 전의를 불태웠다.
양당 대변인의 입이 이처럼 「사복개천」(몹시 더러운 물이 흐르는 내,상말을 마구하는 사람을 지칭) 같은 한 도덕적이고 건강하며 질높은 정치는 요원할 따름이다. 상대방을 욕하고,매도하고 외면하는 한 정치의 생산성 제고는 어렵기 때문이다. 양당 대표가 진정 격조높은 정치를 구현해 보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최소한의 필요조건으로 자당 대변인 입부터 세탁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이상일 정치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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