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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모처럼 시름 던 필리핀 근로자 설잔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2면

『설 연휴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가끔씩 얼굴을 보기는 해도 한국에 있는 우리 동포들이 이렇게 한자리에모여 어울린 일은 드물어요.』 13일 오후「필리핀 노동자 한마당」이 열린 서울성동구마장동 대한적십자사 서울지부 청소년회관.
〈사진〉 서툰 한국말로 행사를 설명하는 필리핀 근로자 마리아 페씨(38.여.재봉사)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불법 체류 3년째로 직장에서「떡값」을 받거나 선물꾸러미를 싸들고 고향을 찾을 처지는 아니지만 그녀에게 이제 설날은 낯설지않은 명절이 됐다.
그래서 쓸쓸함을 달래기 위해 올해는 같은 처지의 필리핀人 1백여명이 모여 모국의 노래와 춤,민속무용 공연등을 즐기기로 한것이다. 『명절만 되면 집 생각도 나고 언제 출국당할지 모르는신세가 더 서글퍼집니다.그래서 이번 설날에는 안면이 있던 사람들만이라도 함께 보낼 계획을 세웠지요.한달쯤 전부터 준비해 어제는 친구들을 초대해 윷놀이도 하고 떡국도 끓여 먹었어 요.』이날 필리핀 민속무용으로 인기를 끈 에드거씨(25.여.재봉사)는 오랜만에 들어보는 박수소리에 감격한듯 끝내 눈물을 글썽였다. 이들은 또 작업중 재해를 당한 동료 근로자들의 병원비와 불법 체류 근로자들을 위한 기금 조성을 위해 행사장 입장권을 판매하고 즉석 모금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아직 정확히 얼마나 돈이 모였는지는 모르겠어요.동료들의 치료비도 좀 보태고 강제 출국되는 사람들의 벌금과 여비에도 도움을 줄 수 있으면 좋을텐데…』 즐거운 하루를 보내면서도 시종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는 이들의 어두운 표정에서 새삼 불법 체류중인 외국인 근로자들의 애환을 느낄 수 있었다.
〈李玟周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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